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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계곡에서 우암선생유적지와 채운암을 돌아봐
화양계곡에서 화양동주로 불리우던 우암송시열 선생의 유적지와 채운암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우암 송시열(1607~1689)선생은 본관은 은진이고 호가 尤庵, 華陽洞主이며
1633(인조11) 생원시에 장원급제, 최명길의 추천으로 경릉참봉됐으나 곧 사직
1635년 봉림대군(효종)의 師傅가 되어 1649년 효종이 즉위하자 북벌계획 추진
이듬해 효종이 죽자 계획은 중지되었고 주자학의 대가로 李珥학통을 계승하여
기호학파의 주류를 이루었으며 예론에도 밝았다고 전하고 1689년 사약으로
떠날때까지 83세로 28회의 관직을 드나들었다고 전한다
유적지에 華陽書院, 萬東廟止, 巖棲齋등이 있었으나 화양서원에는 제향공간은
있는나 강학공간은 없었고 암서재는 강건너 있어 현장은 보지 못하였다.
화양서원은 1696년선생 사후(숙종22) 권상하, 정호등이 도원리 만경대에 건립
그해 사액, 1716년 어필편액을 달았고 만동묘 건립후 1709년 만동묘옆으로 이전
그후 華陽墨牌 폐단으로 1858년(철종9)에 폐쇄되고 1870년(고종7) 모든건물이
헐리고 묘정비는 땅에 묻었다고 하며 잠겨져 있어 들어볼수는 없었으나
화양서원이 대원군서원철폐의 빌미가 되기도 하였다는 사람들도 있다.
만동묘는 우암의 유지를 받든 권상하등이 임진왜란때 1703(숙종29) 원군을
파병한 명나라 신종과 마지막황제인 의종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하기위해 건립
1747(영조23)에는 예조에서 90명이 윤번으로 사당을 지켰고 1809(순조9)에 사당을
다시지었으나 1865(고종2) 철폐하였다가 1874년 부활 1908년 일본에 의해다시철폐
1917년 제사를 금지하고 1937년 제사지내는 유림을 구속, 1942년 건물을 불사르고
1943년 완전철거되었다가 광복후 1983년 괴산군에서 다시 복원하였다고 하며
萬折必東(황하는 아무리 굽어도동쪽으로 흐른다)에서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암서재는 1666(현종7) 우암이 화양동에 들어와 '화양계당'이라는 초가집을 짓고
살다가 1669년경 주자의 雲谷精舍를 본따 3칸으로 짓고 수차례 중건했다.
채운암은 효종4년 혜일선사 창건설과 숙종때 우암이 암자를 지어 煜章寺라
불렀다고 하며 대웅전에는 목조여래좌상이 본존불로 봉안되어 있는데
조선시대 목불로 오른손이 어깨에 들어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였고
왼손은 무릎위에 들어 손바닥을 위로 향한 說法印을 취하고 있어
조선 불상자료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며 1723(경종3) 길쌍게사에서 고성되어
언제부터 이 곳 채운암으로 왔는지는 알수없다고 한다.
우암 송시열 선생의 유적지와 구름에 물든절 綵雲寺(綵雲庵)을 돌아보면서
5백년전의 시간여행을 하는 시간을 가졌다.
세상사 한마디
사찰의 추녀끝에 달린 풍경안의 물고기는 물고기가 공중을 날므로
쳐다보이는 하늘이 바다가 되어 목조건물을 화재에서 보호하고
깨어있을때나 잘때나 살아서나 죽어서나 눈을 뜨고 있는 물고기 처럼
항상 부지런히 도를 닦아 중생을 계도하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풍천재는 제관들의 숙소라 한다
경봉청은 제사음식을 준비하는 전사청과 같다고 한다
非禮不動은 민정중이 명나라 사신으로 갔을대 의종에게서 받아온 어필로
'禮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는 뜻이라 한다
구름에 물든절이 에자의 한획이 떨여져 구름어 물든절이 되었어요
사찰안의 모든 전기시설은 지중화가 되어 있었다.
사찰에서 건너모이는 도명산과 첨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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