姓氏의 故鄕

昌原 黃氏(창원황씨) (132).

아까돈보 2010. 3. 15. 10:42

 

 

 昌原黃氏(창원황씨)

 

 

▣ 由來

 

 

昌原黃氏는 本貫을 같이 하면서도 各各 先祖를 달리하는 8派가 있는데, 이들 8派 사이의 相互關係에 對해서는 뚜렷하게 밝혀진 것이 없으며, 族譜도 各己 따로따로 編纂한다.

[ 侍中公(시중공) 系 ]


始祖 黃忠俊(황충준)은 高麗때 門下侍中을 지냈으며, 그후의 世系는 알수가 없으나, 昌原黃氏가 確實하다고 한다. 黃信(황신)을 1世祖로 하며, 土黃(토황)으로도 불리운다.

檜山君(회산군) 系 ]


始祖 黃石奇(황석기)는 高麗 忠定王(충정왕) 때 都僉議 參理(도첨의 참리)를 지냈고 檜山君에 封해져서 門下平章事(문하평장사)에 올랐다.終來에는 그가 元나라 사람으로 高麗 恭愍王 (노국공주)를 (수행)하여 高麗에 온 것으로 傳해졌으나, 이미 以前에 그는 高麗에서 여러 벼슬을 지내고 1339年에 '조적의 亂'을 平征하는  活躍한 事實이'高麗史'

에 뚜렷이 記錄되어있다.1348年 高麗 29代 忠穆王이 죽자 黃石奇 李齊賢(이제현)과 함께 元나라에가서 30代 忠定王 承襲(승습)을 請하게 되었는데,그 이듬해에 앞서 元나라에 와있던 恭愍王이 元나라 衛王(위왕)의 딸 魯國公主와 結婚하여 歸國하게 되자 黃石奇는 그때 따라 왔던 것이다.唐黃(당황)으로도 불리운다.

[ 戶長公(호장공) 系 ]


始祖 黃亮沖(황양충)은 戶長을 지냈다.

[ 禮賓同正公 系 ] 始祖는 黃星燦(황성찬)
[ 典書公 系 ] 始祖는 黃允奇(황윤기)
[ 戶長公 系 ] 始祖는 黃祐龍(황우용)
[ 糾正公 溪 ] 始祖는 황괘(黃絓)

 

▣ 人物
 

侍中公 系 ]


- 黃梓(황자) : 副提學, 大司憲을 歷任하고 同知府事로 淸나라에 다녀와 記行文 '甲寅燕行錄'과 '庚午燕行錄(경오연행록'을 編述하였다.
- 黃仁儉(황인검) :(黃梓의 큰아들). 刑曺判書를 지냈다.
- (黃仁點(황인) : (黃梓의 둘째 아들). 英祖의 딸 (화유옹주)와 結婚,正祖 때에는 同知 兼 謝恩使가 되어 일곱 차례 淸나라에 다녀왔다.


檜山君 系 ]


- 黃裳(황상) : 黃石奇의 아들. 門下贊成事·西江都元帥(서강도원수) 等을 지냈다.
- 黃衡(황형) : 黃裳의 6世孫. 工曺判書(공조판서)를 지냈다.
- 黃琦(황기) : 黃衡의 아들. 直提學·大司諫을 거쳐 都丞旨, 京畿道 觀察使 等을 歷任하였다.
- 黃愼(황신) : 黃衡의 曾孫. 李栗谷(이율곡)의 門下生으로 鄭汝立의 獄事(1589) 正言으로서 大臣들이 서로 直言을 廻避한 事實을 論駁하다가 左遷되기도 하였으나, 後에 工曺, 戶曺判書를 지냈다.


戶長公 系 ]


- 黃士祐(황사우) : 戶曺,禮曺,吏曺判書를 거쳐 右贊成을 歷任하였다.
- 黃應奎(황응규) : 黃士祐의 아들. 李退溪의 門下生으로 壬辰倭亂 때 折衝將軍(절충장군)에 오르고 敦寧府知事(돈영부지사)를 지냈다.
- 黃暹(황섬) : 黃士祐의 孫子. 副提學, 大司憲이 되었으나, 癸丑獄事(1613) 以後 落鄕하여 學文에만 專念하였다. 小北派의 領首로 領議政을 지낸 柳永慶(유영경)의 妻男이다.

이 밖에 昌原黃氏의 人物로는
- 黃龜河(황구하) : 英祖 때 老論의 重鎭으로 吏曺判書를 지냈다.
- 黃嗣永(황사영):辛酉迫 때 殉敎 帛書(백서)事件의 主人公이다.
- 黃基天(황기천) : 純祖 때의 名文章家이며 名筆이다.
- 黃在英(황재영)(黃必秀) :(名醫(명의)이다.

 

▣ 科擧及弟者(朝鮮時代)

 

  黃致誠(황치성)(1562壬戌生):文科宣祖21(1588)謁聖試甲科壯元及弟
黃哈(황합)(1699己卯生) : 文科英祖20年(1744) 庭試 甲科 壯元及弟
黃益秀(황익수)(1836丙申生):文科高宗3年(1866)庭試甲科壯元及弟
黃曙(황서) (1554 甲寅生) : 文科 宣祖13年(1580) 謁聖試 丙科
黃是(황시) (1555 乙卯生) : 文科 宣祖17年(1584) 親試 乙科
黃致敬(황치경) (1555 乙卯生) : 文科 光海君1年(1608) 중시 丙科
黃玧(황윤) (1623 癸亥生) : 文科 肅宗6年(1680) 春塘臺試 丙科
黃一夏(황일) (1644 甲申生) : 文科 肅宗22年(1696) 庭試 丙科
黃尙老(황상로) (1683 癸亥生) : 文科 英祖9年(1733) 式年試 丙科
等 모두 402名의 科擧及弟者가 있다.
(文科 78名,武科 24名,司馬試 274名,譯科 11名,醫科 6名,律科 8名, 朱學 1名)


▣ 本貫沿革

 

 

本貫所在地 : 慶尙南道 昌原

 

昌原(창원)은 慶尙南道 쪽에 位置하는 産業都市이며 道廳所在地이다.古代에는 金官伽倻(금관가야)에 屬했으나 新羅가 勢力을 確張함에 따라 屈自郡(굴자군)이 設置되었다. 757年(新羅 景德王16)에 義安郡(의안군)으로 이름을 바꾸고,合浦縣(합포현):(馬山)·熊神縣(웅신현):(熊川)·漆隄縣(칠제현) : (漆原)을 領縣으로 管割하였다. 1018年(高麗 顯宗 9)에 金州(금주):(金海)의 屬縣으로 倂合되었다가 뒤에 監務가 派遣되면서 獨立되었다.1274年(元宗 15)과 1281年(忠烈王7)에 元나라와 高麗 聯合軍의 日本 征罰 때 昌原地方 合浦를 中心으로 聯合軍의 基地가 되었다.그 功으로 1282年 義安郡 義昌縣(의창현)으로,合浦縣 會原縣(회원현)으로 昇格되었다.1408年(太宗8)에 會原縣을 倂合하여 昌原府로 昇格되고 慶尙右道 兵馬節度使營이 設置되었으며 1413年에는 昌原度護府(창원도호부)가 되었다.壬辰倭亂 直後인 1601年(宣祖34)에 昌原大都護府로 昇格되었고,1603年(宣祖 36)에 慶尙右道 兵馬節度使營이 晉州로 옮겨갔다.1661年(顯宗 2)~70年(顯宗11)에 縣으로 降되기도 하였다. 1895年(高宗 32) 地方制度 改正으로 晉州府 昌原郡이 되었고,1896年에 慶尙南道 昌原郡이 되었다. 1914年 廢合으로 昌原郡에 다시 編入되었다.1980年에 馬山市 (의창동)을 編入하여 昌原市로 分離 昇格되었다.

 

▣ 人口數

 

  統計廳의 人口調査에 依하면 昌原黃氏는
1985年에는 總 53,593家口 220,812名,
2000年에는 總 78,894家口 252,814名이 있는 것으로 調査되었다.

 

   2010.  2.  7. 伍民轉寫

 

'姓氏의 故鄕' 카테고리의 다른 글

星州 黃氏(성주황씨) (135).  (0) 2010.03.15
慶州 黃氏(경주황씨) (133).  (0) 2010.03.15
長水 黃氏(장수황씨) (131).  (0) 2010.03.15
安山 李氏(안산이씨) (130).  (0) 2010.03.14
水原 李氏(수원이씨) (129).  (0) 2010.0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