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始祖 國子博士(국자박사) 姜啓庸(강계용)은 1274年(高麗 元宗15年)通信使庶常館(통신사서상관)으로 日本을 다녀왔다. 孫子 姜師瞻(강사첨)의 5世孫 中 첫째 아들 姜淮伯(강회백)의 後孫을 通亭公派(통정공파),둘째아들 姜淮仲(강회중)의 後孫을 通溪公派(통계공파)로 區分(구분)하는데,이들의 後孫에서 가장많은 人物이나왔다.通亭公派의 通亭 姜淮伯(통정 강회백)은 高麗 末에 大司憲(대사헌)을 지내고 朝鮮 開國 後 東北面都巡問使(동북면도순문사)에 올랐으며,性理學(성리학)에도 밝았다.그의 아들 姜碩德(강석덕)은 世宗의 둘째 夫人 令嬪姜氏(영빈강씨)의 아버지로서 開城留守(개성유수),知敦寧府事(지돈령부지사)等을 지냈으며,詩와 글씨에 能했다.姜碩德의 아들 姜希顔(강희안),姜希孟(강희맹)兄弟는 通亭公派의 代表的 人物로 꼽는데,姜希顔은 世宗23年 文科에 及弟하고,集賢殿(집현전)直提學(직제학)이 되어 鄭麟趾(정인지),成三問(성삼문)等과 訓民正音 創製(훈민정음 창제)에 參與하였다.뒤에 端宗復位(단종복위)에 連累(연루)되었으나"참으로 賢士(현사)이니 죽이지 말고 重用(중용)하라"는 成三問의 辯護(변호)로 禍(화)를 免하고 뒤에 戶曺參義를 지냈다. 그는 詩書畵三絶(시서화삼절)이라 불려질 程度(정도)로 이 方面(방면)에 있어 當代(당대)의 獨步的(독보적)인 存在(존재)였다.燕山君(연산군)때 右議政(우의정)을 지낸 姜龜孫(강구손)은 그의 아들이고,世祖 때 領議政(영의정)을 지낸 姜孟卿(강맹경)은 姜希顔의 4寸 兄이다. 姜希顔의 동생 姜希孟(강희맹) 또한 當代의 文章家(문장가)이자 書畵家(서화가)로 世祖의 寵愛(총애)를 받아 世子賓客(세자빈객)이 되고 兵曺判書(병조판서),吏曺判書(이조판서)等을 거쳐 左贊成(좌찬성)에 올랐다.通溪公派에서는 宣祖 때 右議政을 지낸 姜士尙(강사상)과 亦是 宣祖때 平難功臣(평난공신)에 오르고 吏曺,兵曺判書를 거쳐 中樞院判事(중추원판사)를 지낸 眞興君(진흥군) 姜紳(강신)과 王子師傅(왕자사부)를 거쳐 壬辰倭亂 때 扈聖功臣(호성공신)에 오르고, 晋昌君(진창군)에 封해진 姜絪(강인) 兄弟가 빼어났다.
丁卯胡亂(정묘호란)의 主役으로불리는 姜弘立(강홍립)도 姜紳의 아들이다.特히 姜絪의 後孫은 高宗 때에 와서 姜浚欽(강준흠), 姜時永(강시영),姜文馨(강문형), 姜蘭馨(강난형), 姜友馨(강우형), 姜國馨(강국형)等判書級人物을 輩出해서 名家로 꼽힌다. 이 밖에 仁祖 때 火砲術(화포술)을 傳한 姜弘重(강홍중)이 있다.
-少監公派(소감공파)
中始祖 姜渭庸(강위용)은 司徒少監(사도소감)을 지냈다. -侍中公派(시중공파) 姜遠庸(강원용)은 門下侍中(문하시중)을 지냈다.
-殷烈公派(은열공파)
中始祖 姜民瞻(강민첨)은 仁憲公派(인헌공파)의 派祖姜邯贊(감감찬)과 더불어 慈州大捷(자주대첩)(薩水大捷)의 戰功으로 高麗史에 크게 武勳을 세운 名將이다. 이 派에서는 特히 姜栢年(강백년),姜鋧(강현), 姜世晃(강세황)의 3代와 姜老(강노)가 有明하다. 姜栢年은 朝鮮 縣宗 때 觀察使(관찰사),禮曺判書(예조판서),左贊成(좌찬성)에 이르렀으며,뒤에 領議政(영의정)에 追贈(추증)되고 淸白吏(청백리)에 祿選(녹선)되었는데,文名(문명)이 높았다.그의 아들 姜鋧은 禮曺, 刑曺判書를 거쳐 左贊成,大提學을 歷任하였다.姜鋧의 아들 姜世晃은 漢城判尹과 各曺 參判(각조 참판)을 거쳤으며,詩書畵(시서화)로 더 有明하였다. 姜老는 姜世晃의 曾孫子로,哲宗 때 大司諫,兵曺判書를 거쳐 左議政에 이르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