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麗(고려) 明宗(명종)때 '江左七賢(강좌칠현)'의 한 사람으로 名聲(명성)을 떨친 皇甫抗(황보항)과 大司成(대사성)을 지낸 皇甫倬(황보탁)이 有明(유명)했으며,定宗(정종)때 參知政事(참지정사)·平章事(평장사)를 지낸 皇甫穎(황보영)과 高宗(고종)때 左僕射(좌복야)·門下侍郞平章事(문하시랑평장사)에 이른 皇甫琦(황보기) 等이 뛰어난 人物(인물)이다. 한편 皇甫兪義(황보유의)는 高麗(고려) 顯宗(현종)이 卽位(즉위)하는데 功獻(공헌)했으며 1031年(顯宗22) 中樞使(중추사)를 거쳐 吏部尙書(이부상서)와 參知政事(참지정사)를 지냈고 德宗(덕종)때는 門下平章事(문하평장사)에 올랐다. 恭愍王(공민왕) 때 紅巾賊(홍건적)의 亂(란)을 討平(토평)하고 一等功臣(일등공신)에 오른 皇甫臨(황보임)은 1388
年(禑王14) 遼東征伐(요동정벌)때 副元帥(부원수)로서 李成桂(이성계)의 威化島回軍(위화도회군)에 加擔(가담)하여 一等功臣(일등공신) 에 오르고 三道(삼도) 都體察使(도체찰사)가 되었으며 朝鮮(조선)이 開國(개국)된 後(후) 知中樞院使(지중추원사)에 올랐다. 皇甫臨(황보임)의 아들 皇甫仁(황보인)은 太宗(태종)때 文科(문과)에 及弟(급)하고, 世宗(세종)때 將令(장령)과 兵曺判書(병조판서)를 거쳐 平安(평안)·咸吉道(함길도) 體察使(체찰사)가 되어 10年 동안 金宗瑞將軍(김종서장군)과 함께 六鎭(육진)을 開拓(개척)하였다.그는 太宗(태종) 世宗(세종) 文宗(문종) 3代에 걸쳐 都丞旨(도승지)를 비롯하여 觀察使(관찰사)·左贊成(좌찬성)·右左議政(우좌의정) 等(등) 主要(주요)官職(관직)을 두루 歷任(역임)하여 朝廷(조정)의 重臣(중신)이 되었으며,1452年(文宗 2) 領議政(영의정이되어 어린 端宗(단종)을 輔弼(보필)하다고 癸酉靖難(계유정나)때 金宗瑞(김종서),鄭扮(정분) 等(등)과 함께 首陽大君(수양대군)에게 殺害 當(살해 당)했다.이때 그의 두아들 參判(참찬)을 지낸 皇甫錫(황보석)·直長(직장)을 지낸 皇甫欽(황보흠)과 小子(소자)皇甫源(황보원),皇甫汶(황보문) 等(등) 다섯 사람이 禍(화)를 當(당)하니 永川(영천) 皇甫氏(황보씨)에게 큰 打擊(타격)이 되었다. 그 後(후)로 나머지 一族(일족)들은 뿔뿔히 흩어지거나 붙잡혀 섬이나 먼邊方(변방)의 官吏(관리)나 賤民(천민)이 되기도 하였으며, 姓(성)을 바꾸며 숨어 살기도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