姓氏의 故鄕

永順 太氏(영순태씨) (169).

아까돈보 2010. 3. 15. 23:07

 

 

 
 永順太氏(영순태씨)
 

▣ 由來

 

 

始祖 : 太金就(태금취)


始祖(시조)太金就[(태금취,一名 太金龍(태금룡)]는 太仲象(태중상)의 18世孫(세손)으로 上將軍(상장군)을 지냈다. 또한 兵馬元帥(병마원수)로 永川君(영천군)에 封(봉)해진 太雄成(태웅성)의 아들이다.
始祖(시조)太金就(태금취)는 高麗(고려) 高宗(고종)때 金郊(금교)에서 蒙古軍(몽고군)을 擊退(격퇴)하는데 功(공)을 세워 大將軍(대장군)에 올라 永順君(영순군)에 封(봉)해져,尙州郡(상주군) 北面(북면)林下村(임하촌)에 定着(정착)하여 살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後孫(후손)들은 俠溪太氏(협계태씨)에서 分貫(분관)하여 本貫(본관)을 永順(영순)으로 삼아오고 있다.

 

▣ 人物

 

 

太孝貞(태효정)의 아들 太斗南(태두남)이 뛰어났다.그는 일찍이 金震陽(김진양)의 門下(문하)에서 學文(학문)을 배워 1513年(中宗8) 生員(생원),進士(

사) 兩試驗(양시험)에 合格(합격),같은 해 式年文科(식년문과)에 及弟(급제)하여 刑曹佐郞(형조좌랑)을 거쳐 司憲府執義(사헌부집의)를 지냈으며,1536年(中宗31)宗府寺正(종부시정)이 되어 春秋館編修官(춘추관편수관)을 兼(겸

)했으나 權臣(권신) 金安老(김안로)의 미움을 사서 星州(성주) 牧使(목사)로 左遷(좌천)되었다.特(특)히 그는 詩文(시문)에 뛰어나 著書(저서)로 蔘言(쇄언)을 남겼으며,沃川書院(옥천서원)에 祭享(제향)되었다.以外(이외) 太偃龍(태언룡)과 太舜民(태순민)이 進士(진사)를 지냈다.
 

▣ 科擧及弟者(朝鮮時代)

 

  太斗南(태두남),(1486 丙午生) : 文科 中宗8年(1513) 式年試 乙科
太應奎(태응규),(1675 乙卯生) : 司馬試 肅宗28年(1702) 式年試
太錫龍(태석룡),(1675 乙卯生) : 司馬試 中宗38年(1543) 式年試 三等
太斗南(태두남),(1675 乙卯生) : 司馬試 中宗8年(1513) 式年試 三等
太偃龍(태언룡),(1675 乙卯生) : 司馬試 明宗1年(1546) 式年試 三等
太舜民(태순민),(1539 己亥生) : 司馬試 宣祖3年(1570) 式年試 三等
太錫龍(태석룡),(1539 己亥生) : 司馬試 中宗38年(1543) 式年試 三等
太斗南(태두남),(1539 己亥生) : 司馬試 中宗8年(1513) 式年試 三等
等 모두 8名의 科擧 及弟者가 있다.
(文科 1名, 司馬試 7名)


▣ 本貫 沿革

 

 

本貫所在地 : 慶尙北道 聞慶


永順(영순)은 慶尙北道(경상북도) 聞慶市(문경시) 永順面(영순면) 一帶(일대)의 옛 地名(지명)으로 本來(본래)는 尙州(상주) 北面(북면) 林下村(임하촌)이었다.高麗(고려)때 이 마을 사람 太金就(태금취)가 蒙古(몽고)를 攻擊(공격)하는데 功(공)을 세워 永順縣(영순현)으로 昇格(승격)시키고 尙州(상주)에 屬(속)하게 하였다.1906年 越境地(월경지) 整理(정리)로 尙州(상주)

에 屬(속)해있던 永順面(영순면)이 聞慶郡(문경군)에 編入(편입)되었다.
 

▣ 人口數

 

 

統計廳(통계청)의 人口調査(인구조사)에 依하면 永順太氏(영순태씨)는
1985年에는 總 902家口 3,638名,
2000年에는 總 1,302家口 4,142名이 있는 것으로 調査(조사)되었다.

 

2010.  2.  27. 伍民  轉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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