姓氏의 故鄕

豊山 沈氏(풍산심씨) (267).

아까돈보 2010. 4. 20. 01:04

 

 

 
:: 豊山沈氏(풍산심씨) ::
 

由來

 

 

始祖 : 沈滿升(심만승)


始祖(시조) 沈滿升(심만승)은 原來(원래) 中國(중국)吳興(오흥)사람으로 1110年(高麗 隸宗5年)에 同僚(동료)인 福州(복주)사람 胡宗旦(호종단), 浙江(절강)사람 劉載(유재)·,安愼之(안신지)等(등)과 함께 商船(상선)을 따라 東海岸(동해안)에 到着(도착)하여 太白山(태백산)아래 豊山縣(풍산현)에 定着(안착)하였다.

그는 文章(문장)이 뛰어나 王(왕)의 寵愛(총애)를 받았으며 淸宦職(청환직)에 拔擢(발탁)되고 1114年(睿宗9年) 太子詹事副詹事(태자첨사부첨사)에 오르고 豊山(풍산)에 代代(대대)로 살았으므로 後孫(후손)들이 豊山(풍산)을 本貫(본관)으로 였다.
 

▣ 人物

 

 

始祖(시조)滿升(만승)의 8世孫(세손)承慶(승경)이 高麗末(고려말)에 典農寺事(전농시사)와 上護軍(상호군)을 지내고 亂政(란정)이 날로 甚(심)해지자 이를 慨嘆(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鄕里(향리)로 돌아와 餘生(여생)을 마쳤고,그의 아들 龜齡(귀령)이 朝鮮初期(조선초기)에 크게顯達(현달)하여 家勢(가세)를 일으켰다.太祖(태조) 7年 第1次 王子(왕자)의 亂(란)에 大將軍(대장군)으로 芳遠(방원)을 도와 朴元吉(박원길)과 鄭道傳(정도전)을 除去(제거)하는데 功(공)을 세웠던 龜齡(구령)은 第2次 王子(왕자)의 亂(란)에도 芳遠(방원)에게 加擔(가담)하여 太宗(태종)이卽位(즉위)하자 佐命四等功臣(좌명사등공신)으로 豊川君(풍천군)에 封(봉)해졌으며, 太宗(태종)8年 助戰節制使(조전절제사)로 全羅道(전라도)沿岸(연안)에侵入(침입)한 倭寇(왜구)를 擊破(격파)하여 크게 武名(무명)을 떨쳤다.

中宗反正(중종반정)에 參與(참여)하여 靖國三等功臣(정국삼등공신)으로 豊昌

君(풍창군)에 封(봉)해졌던 亨(형)과 左議政(좌의정)에 올랐던 貞(정)의 兄弟(형제)는 豊山府院君(풍산부원군)應(응)의 아들로서 昭格署令(소격서령)을歷

任(역임)한 아우 義(의)와함께名聲(명성)을 떨쳐 家門(가문)을盤石(반석)위에 올려놓았다.
燕山君(연산군)의 暴政(폭정)이 極(그)에 이르렀던 燕山君(연산군)8年에 別試文科(별시문과)에 及第(급제)한 貞(정)은中宗反正(중종반정)에加擔(가담)하여 靖國三等功臣(정국삼등공신)으로 花川君(화천군)에 封(봉)해졌고,成川府事(성천 부사)와 漢城府判尹(한성부판윤)을 거쳐 刑曺判書(형조판서)에 任命(임명)되었으나 新進士類(신진사류)인 趙光祖(조광조) 一派(일파)의 彈劾(탄핵)으로 罷職(파직)되었다.이에 怨恨(원한)을 품고 南袞(남 곤)·洪景舟(홍경주)을 제거 左議政(좌의정)에 이르렀다.

思遜(사손)의 아들 守慶(수경)은 75歲(세)와 81歲(세)에 아들을낳아 年老生子(연로생자)의 記錄(기록)을 세웠고, 八道觀察使(팔도관찰사)를 지낸 後(후) 淸白吏(청백리)에 祿選(녹선)되었다.特(특)히 그는 儒學者(유학자)이면서도武藝(무예)에 뛰어나 말을 달리며 활을쏘는데 五發四中(오발사중)을 하여 武功(무공)을 떨쳤으며,文章(문장)과 글씨에能(능)하여 많은 冊(책)을 著述(저술)하였으나 燒失(소실)되고 [喪制雜儀(상제잡의)]와 [遣閑雜錄(견한잡록)],[歸田唱

酬(귀전창수)]만이 남아 傳(전)한다.
그가 開城留守(개성유수)로 나갔을 때當時(당시)迷信(미신)으로 鬼神(귀신)을 섬기는 淫祠(음사)가 많이 있었는데 宮中(궁중)과 聯關(연관)을 맺어 福(복)을 비는 곳으로 되어 있어 官(관)에서도 손을쓰지 못했던 것을,그가 儒生(유생)들의 請(청)으로 因(인)하여 祠堂(사당)집을 불사르고 巫堂(무당)을 잡아 가두었다.이에 文政王大妃(문정왕대비)가 크게 怒(노)하여 맨먼저 主張(주장)한 儒生(유생)을 잡아 가두자 守慶(수경)은 <모든것이 내가 한 일이므로 儒生(유생)은 罪(죄)가 없다> 하고 自劾疏(자핵소)를 올리니 王(왕)은 嘉尙(가상)히 여겨 罰(벌)주지 않았다.

그가 開城(개성)을 떠나올 때 百姓(백성)들이 거리를 메워 수레를 에워싸고 울면서 참아 놓지 못했으며,碑(비)를 세우고 노래를 지어 思慕(사모)하였는데 只今(지금)까지 그 노래가 傳(전)해내린다고 한다.

 

▣ 科擧及第者(朝鮮時代)

 

  沈守慶(심수경) (1516 丙子生) : 文科明宗1年(1546) 式年試 甲科 壯元及第
沈梓(심제) (1516 丙子生) : 文科 仁祖24年(1646) 重試 乙科
(沈思遜(심사손)癸丑生) : 文科燕山君8年(1502) 別試二等
沈宰(심제) (1597 丁酉生) : 文科 仁祖11年(1633) 增廣試 丙科
沈日運(심일운) (1596 丙申生) : 文科 仁祖11年(1633) 增廣試 丙科
沈義(심의) (1475 乙未生) : 文科 中宗2年(1507) 增廣試 丙科
沈思順(심사순) (1475 乙未生) : 文科 中宗12年(1517) 別試 丙科
沈世霖(심세림) (1475 乙未生) : 文科 中宗33年(1538) 別試2 乙科
沈櫓(심노) (1590 庚寅生) : 文科 仁祖13年(1635) 增廣試 乙科
等 모두 56名의 科擧及第者가 있다.
(文科 15名, 武科 1名, 司馬試 40名)


▣ 行列字(항렬자)

 

 
25世
식(植)
진(鎭)
26世
혁(爀)
순(淳)
27世
기(基)
만(萬)
28世
현(鉉)
병(昞)
29世
수(洙)
무(茂)
30世
동(東)
31世
열(烈)
32世
철(喆)
33世
호(鎬)
34世
락(洛)
35世
구(求)
36世
형(炯)
37世
균(均)
38世
용(鎔)
39世
택(澤)
40世
-
41世
-
42世
-
43世
-
44世
-
  ※ 世와 代는 다른 것으로 世에서 1을 뺀 값이 代가 된다. (예: 26世孫은 25代孫)
 

▣ 本貫沿革

 

 

本貫所在地 : 慶尙北道 安東


豊山(풍산)은 慶尙北道(경상북도) 安東市(안동시)豊山邑(풍산읍)一帶(일대)의 옛 地名(지명)으로 新羅(신라)때에는 下枝縣(하지현)이라 불리었다. 757年(新羅 景德王16)에 永安(영안)으로 改稱(개칭)되어 醴泉郡(예천군)의 管轄(관할)로 하였다.923年(高麗 太祖6)에는 豊山(풍산) 또는 豊岳縣(풍악현)이라 改稱(개칭)하였고,1018年(顯宗9)에 吉州(길주:安東)에隸屬(예속)되었다가1172年(明宗2)에 監務(감무)가 派遣(파견)되면서 獨立(독립)하였다가 뒤에 安東都護府(안동도호부)에 合屬(합속)되었다. 1914年 郡面廢合(군면폐합)으로 安東郡(안동군) 豊山縣(풍산현)의 4個洞(개동) 및 西先面(서선면) 一部(일부) 7個洞(개동)을 倂合(병합)하여 豊山面(풍산면)으로 改稱(개칭)하여 11個洞(개동)으로 改編(개편) 管轄(관할)하다가 1973年에 豊山面(풍산면)이 邑(읍)으로 昇格(승격)하였다. 1995年 安東市(안동시)에 統合(통합)되었다.
 

▣ 人口數

 

 

統計廳(통계청)의 人口調査(인구조사)에 依(의)하면 豊山沈氏(풍산심씨)는
1985年에는 摠 2,772家口 12,024名,
2000年에는 摠 3,397家口 10,990名이 있는 것으로 調査(조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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