琴儀(금의)의 맏아들 琴基(금기)는 戶部員外郞(호부원외랑),둘째아들 琴奎(금규)는 工部員外郞(공부원외랑),넷째아들 琴徽(금휘)는 左右衛大將軍(좌우위대장군),다섯째 琴喜(금희)는 閤門祗候(합문지후)에 이르렀다.그리고元宗(원종)때에 閤門副使(합문부사)를 지내고, 三別抄(삼별초)의 亂(란)때 王命(왕명)으로 元(원)나라에 가서 援兵(원병)을 要請(요청)한 琴熏(금훈)도 이 집안 出身(출신)이다.
朝鮮時代(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李成桂(이성계)와 通婚(통혼)하여 挑躍(도약)의 契機(계기)를 마련하였으나 뜻하지 않은 王子(왕자)의 亂(란)에 휘말려 困境(곤경)에 處(처)한 後(후)부터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學文(학문)에만 精
進(정진)한 까닭에 겨우 14名(명)의 文科及第者(문과급제자)를 내는 데에 그
쳤다.琴儀(금의)의 後孫(후손) 琴仁誹(금인배)가 太祖(태조)의 넷째아들 懷安
大君(회안대군:芳幹)을 사위로 삼아 國婚(국혼)을 하였으나 第1次 王子(왕자)의 亂(란)後(후) 論功行賞(논공행상)에 不滿(불만)을 품은 朴苞(박포)의 거짓 密告(밀고)를 믿은 芳幹(방간)이 第2次 王子(왕자)의 亂(란)을 일으켰다가 芳
遠(방원)에게 敗(패)하여 歸養(귀양)가게 되자 妻族(처족)인 琴氏(금시)도 이의 影嚮(영향)을 받아 빛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朝鮮朝(조선조)에서 맨처음 벼슬길에 오른 琴柔(금유)는 太祖朝(태조조)에 文科(문과)에 及第(급제),大司成(대사성)에 올랐으며 性品(성품)이淸白(청백)해서 그가 湖南(호남)을 按察(안찰)할 때 貪虐(탐학)한守令(수령)들은 스스로 官職(관직)을 버리고 逃亡(도망)쳤다고 한다.또 그의아들 琴以詠(금이영)은世宗朝(세종조)에 文科(문과)에 及第(급제),舍人(사인)을 지냈는데 金宗直(김종직)이 그에게 보내는 詩(시)에<先生의 재주는 옛사람도 比肩(비견)하지못한다.고 할
만큼 詩文(시문)에 뛰어났다. 琴崑(금곤)·琴嵩(금숭) 兄弟(형제)는 淑(숙)의 아들로 文宗朝(문종조)에 兄弟(형제)가 同時(동시)에 科擧(과거)에 及第(급제)하는 榮光(영광)을 누렸다. 惺齋(성재) 琴蘭秀(금난수)는 掌藝院司評(장례원사평)을 지내다가 壬辰倭亂(임진왜란)이 일어나자 漲意(창의)하였고,뒤에 奉化縣監(봉화현감)에 任命(임명)되었으나 겨우 1年을넘기고 돌아와서 學文(학문)에精進(정진)했다.그의 아들 業(업)과 개도 聯壁(연벽)하여 또 한 次例(차례) 琴氏(금씨)의 이름을 높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