姓氏의 故鄕

奉化 琴氏(봉화금씨) (317).

아까돈보 2010. 5. 14. 07:33

 

 


 
 奉化琴氏(봉화금씨)
 

▣ 由來

 

 

始祖 : 琴容式(금용식)


始祖(시조)琴容式(금용식)은 箕子(기자)와 함께 우리나라에 온琴應(금응)의後孫으로 高麗初(고려초) 三韓功臣(삼한공신)인 太師(태사)를 지냈다. 그러나 琴應(금응)으로부터 琴容式(금용식)까지의 世系(세계)를 考證(고증)할 수 없고,또 琴容式(금용식)으로부터 6世(셰) 乃至(내지)8世(셰)의 世系(세계)가 失

傳(실전)되어 琴儀(금의)를 中始祖(중시조)로 하고 있다.琴儀(금의)는高麗(고려) 明宗(명종)과 高宗(고종)사이의 名臣(명신)이었으며,文章(문장)이 뛰어나 琴學士(금학사)라는 別稱(별칭)을가졌고 官職(관직)은 平章事(평장사)에 이르렀다.

- 金浦郡(김포군) 奉火山(봉화산)에 있으며 3月 9月中에 享祀(향사)한다.

 

▣ 人物

 

 

琴儀(금의)의 맏아들 琴基(금기)는 戶部員外郞(호부원외랑),둘째아들 琴奎(금규) 工部員外郞(공부원외랑),넷째아들 琴徽(금휘) 左右衛大將軍(좌우위대장군),다섯째 琴喜(금희) 閤門祗候(합문지후)에 이르렀다.그리고元宗(원종)때에 閤門副使(합문부사)를 지내고, 三別抄(삼별초)의 亂(란)때 王命(왕명)으로 元(원)나라에 가서 援兵(원병)을 要請(요청) 琴熏(금훈)도 이 집안 出身(출신)이다.

朝鮮時代(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李成桂(이성계)와 通婚(통혼)하여 挑躍(도약) 契機(계기)를 마련하였으나 뜻하지 않은 王子(왕자)의 亂(란)에 휘말려 困境(곤경)에 處(처)한 後(후)부터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學文(학문)에만 精

進(정진)한 까닭에 겨우 14名(명)의 文科及第者(문과급제자)를 내는 데에 그

쳤다.琴儀(금의)의 後孫(후손) 仁誹(금인배)가 太祖(태조)의 넷째아들 懷安

大君(회안대군:芳幹)을 사위로 삼아 國婚(국혼)을 하였으나 第1次 王子(왕자)의 亂(란)後(후) 論功行賞(논공행상)에 不滿(불만)을 품은 朴苞(박포)의 거짓 密告(밀고)를 믿은 芳幹(방간)이 第2次 王子(왕자)의 亂(란)을 일으켰다가 芳

遠(방원)에게 敗(패)하여 歸養(귀양)가게 되자 妻族(처족)인 琴氏(금시)도 이의 影嚮(영향)을 받아 빛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朝鮮朝(조선조)에서 맨처음 벼슬길에 오른 琴柔(금유)는 太祖朝(태조조)에 文科(문과)에 及第(급제),大司成(대사성)에 올랐으며 性品(성품)이淸白(청백)해서 그가 湖南(호남) 按察(안찰)할 때 貪虐(탐학)한守令(수령)들은 스스로 官職(관직)을 버리고 逃亡(도망)쳤다고 한다.또 그의아들 琴以詠(금이영)은世宗朝(세종조)에 文科(문과)에 及第(급제),舍人(사인)을 지냈는데 金宗直(김종직)이 그에게 보내는 詩(시)에<先生의 재주는 옛사람도 比肩(비견)하지못한다.고
 할

만큼 詩文(시문)에 뛰어났다. 琴崑(금곤琴嵩(금숭) 兄弟(형제) ()의 아들로 文宗朝(문종조)에 兄弟(형제)가 同時(동시)에 科擧(과거)에 及第(급제)하는 榮光(영광)을 누렸다. 惺齋(성재) 琴蘭秀(금난수)는 掌藝院司評(장례원사평)을 지내다가 壬辰倭亂(임진왜란)이 일어나자 漲意(창의)하였고,뒤에 奉化縣監(봉화현감)에 任命(임명)되었으나 겨우 1年을넘기고 돌아와서 學文(학문)에精進(정진)했다.그의 아들 業(업)과 개도 聯壁(연벽)하여 또 한 次例(차례) 琴氏(금씨)의 이름을 높였다.
 

▣ 科擧及第者(朝鮮時代)

 

  琴嵩(금숭) : 文科 文宗1年(1450) 式年試 丁科
琴尙絃(금상현) (1587 丁亥生) : 文科 仁祖2年(1624) 式年試 丙科
琴暹(금섬) (1659 己亥生) : 文科 肅宗16年(1690) 式年試 丙科
琴詩述(금시술) (1783 癸卯生) : 文科 憲宗10年(1844) 增廣試 丙科
琴椅(금의) (1489 己酉生) : 文科 中宗14年(1519) 式年試 丙科
琴愷(금개) (1562 壬戌生) : 文科 宣祖34年(1601) 式年試 丙科
琴業(금업) (1557 丁巳生) : 文科 宣祖34年(1601) 式年試 丙科
琴柔(금유) (1557 丁巳生) : 文科 太祖5年(1396) 式年試 丙科
琴聖奎(금성규) (1636 丙子生) : 文科 肅宗4年(1678) 庭試 乙科
琴忠達(금충달) (1594 甲午生) : 文科 仁祖2年(1624) 增廣視 丙科
等 모두 68名의 科擧 及第者가 있다.
(文科 14名, 武科 2名, 司馬試 52名)


▣ 行列字(항렬자)

 

 
29世
병(秉)
30世
하(夏)
31世
중(重)
32世
모(謨)
33世
도(道)
34世
휴(休)
35世
진(晋)
36世
철(喆)
37世
종(鍾)
38世
영(永)
39世
상(相)
40世
영(榮)
41世
-
42世
-
43世
-
44世
-
45世
-
46世
-
47世
-
48世
-
  ※ 世와 代는 다른 것으로 世에서 1을 뺀 값이 代가 된다. (예: 30世孫은 29代孫)
 

▣ 本貫 沿革

 

 

本貫所在地 : 慶尙北道 奉化


奉化봉화)는 慶尙北道(경상북도)奉化郡(봉화군)의 옛 地名(지명)으로 新羅(신라)때에는 古斯馬縣(고사마현)이라 불리었다.757年(新羅景德王16)에 玉馬縣(옥마현)으로 바뀌었고,奈靈郡(내령군:榮州)의 領縣(영현)이 되었다.940年(高麗 太祖23)에 奉化縣(봉화현)으로 改編(개편)되어 現在(현재)의 地名(지명)을 갖게 되었다. 1018年(顯宗 9)에는 安東(안동) 屬縣(속현)이었다가,1390年(高麗 恭讓王2)監務(감무)를 設置(설치)하여 獨立(독립)하였는데,이때 安東府(안동부)所屬(소속)의 彌良部曲(미량부곡)·買土部曲(매토부곡)을 編入(편입)하였다.朝鮮初(조선초)의 郡縣制(군현제)改編(개편)으로 1413年(太宗13)에 縣(현

)이 되었다.1457年(世祖 3)에 端宗復位運動(단종복위운동)으로 順興府(순흥

부)가 革罷(혁파)되어 文殊山(문수산) 以東地域(이동지역)을 나누어 받았다가 1683年(肅宗9)順興(순흥)이 復舊(복구)되면서 移讓(이양)하였다.壬辰倭亂後(임진왜란후) 宣祖代(선조대)에 奧地(오지)인 이 고을 太白山(태백산) 覺華寺(각화사)近處(근처)에 璿源閣(선원각)과 實錄等(실록등)을 保管(보관)하는 史庫(사고)가 設置(설치)되어 太白山史庫(태백산사고)로 불리었다.1895年(高宗 32 地方制度改正(지방제도개정)으로 安東府(안동부) 奉化郡(봉화군)이 되었고,1896年 慶尙北道(경상북도)로 移屬(이속)되었다.1913年에 交通便宜(교통편의)를 爲(위)해郡廳舍(군청사)를 春陽面(춘양면)으로부터 奉化面(봉화면)으로 옮겼다.1914年 郡面廢合(군면폐합)으로 郡內面(군내면)과 北面(북면)이鳳城面(봉성면)으로 統合(통합)되었고,1956年에 乃城面(내성면)이 奉化面(봉화면)으로 改稱(개편)되었으며,1978年 奉化面(봉화면)이 奉化邑(봉화읍)으로昇格(승격)되었다
 

▣ 人口數
 

統計廳(톤계청)의 人口調査(인구조사)에 依(의)하면 奉化琴氏(봉화금씨)는
1985年에는 摠 4,696家口 19,687名,
2000年에는 摠 6,476家口 21,072名이 있는 것으로 調査(조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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