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플쏘프의 자화상
Robert Mapplet!!horpe
(1946-1989미국)
최근의 유명한 사진작가 가운데서
로버트 메이플쏩만큼 드라마틱하게 인생을 살다간
사람도 드물 것이다. 포르노에 가까운 사진들, 게이를 비롯한
S&M(새대즘과 마조키즘) 을 주제로한 과감한 사진을 비롯 그와는
너무도 대조적인 꽃 사진들 등등 그의 작품은 언제나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1946년 뉴욕의 롱아일랜드에 태어난 그는
전형적인 카톨릭가정에서 태어나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랐으나 안정적이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는
시골 생활을 못견디고 언제나 집을 떠날
생각만 한다. 그는 아버지의 권유로
뉴욕의 프랫 인스티튜트에
입학은 하지만
그래픽아트를 전공한 뒤
예술가가 돼서 생계를 어떻게 유지할 수 있겠느냐는
아버지의 강력한 반대도 무릎 쓰고 그때부터 진정한 예술가가
되고 싶다는 열망 하에 전공을 광고디자인에서 그래픽 아트로 바꾼다.
졸업을 하고 록 가수이며 전위예술가인 패티 스미스를
만나고 난 뒤 그의 인생은 달라지기 시작한다.
그녀의 자유분방함과 예술적인 기질이
메플쏩과 조화를 이루며
그들은 그 유명한 첼시
호텔에서 동거를 시작한다.
하지만 이것도 오래가지 못하고
그들은 헤어지게 된다. 이를 계기로 로버트는
오랜 카톨릭 분위기에서 자라 스스로 죄의식을 갖고 자제하던
게이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그가 사진을 찍게 된 것은
보석디자인이나 꼴라쥬 작품을 만들면서 이지만
점차 사진기라는 기계가 현대 예술특성을
안다는 생각을 한다. 메트로폴리탄
예술박물관 큐레이터인
존 메켄드리를 만난 뒤
알프레드 스티글리츠나 에드워드
스타이젠의 흑백사진을 보고 나서 더욱 더 흑백사진이
예술의 한 분야가 될 수 있겠다는
확신을 가진다. 예술가란
명예와 부에 초연해야
한다는 막연한 사회적 통념을 깨고 그는
늘 성공해서 부자가 되기를 꿈꿨다. 패티 스미스의
앨범 표지가 성공을 거뒀을 때 그들은 마침내 그들이 원하던 성공을
거두었다고 즐거워했다. 그렇다고 돈을 위해서 예술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예술가로 성공해 돈을 벌수 있게 되기를
늘 갈망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앤디 워홀의
예술과 그의 성공을 모델 삼아
그처럼 되고 싶어했던 것이다.
그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뒤
자신의 전시회에 부모님을 초대해서 자랑을 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그의 성공을 믿지 않고 오히려 아들의 사진 찍는 기술에
대해서도 의심을 했다. 자신의 성공을 자랑하던 그에게 아버지는
depth of field가 뭔지를 물어보지만 로버트는 자신이 단순한
사진가가 아니라 사진을 매개로 하는 예술가라고
당당히 항변을 한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가
찍은 사진을 스스로 인화하지 못하는
최초의 사진가로 기록되고 싶다고
말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예술과 돈과 섹스였을 뿐이었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영향력을 끼친 사람이라면
샘 와그스탭(Sam Wagstaff)일 것이다. 그는 로버트의 후원자이며
애인이며 사진에 관한 조언자였다. 그의 물질적 정신적 후원이 없었다면
로버트의 사진도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는 사진을 입수하면 언제나 로버트에게
보여주며 그의 의견을 묻곤 했었다.로버트가 게이나 성에 집착한 사진을
찍다가 전혀 상반된 꽃에 관한 사진을 찍기 시작한다.
그는 꽃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사진에 빛이 어떻게
작용하는 가를 스스로 터득하게 된다.
사람을 모델로 하면서 그의
기술적인 무지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정물인 꽃을 대상으로 빛에 따라 사물이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연습했던 것이다. 그가 꽃을 찍은
또 다른 숨은 뜻은 돈을 벌기 위한 것도 있었다. 게이 사진을 거실 벽에
걸어 놓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어도 아름다운 꽃은 훨씬 더 벽에
걸릴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었다. 꽃과 게이, 섹스에 대한
사진에서 다른 영역의 사진을 찍어 보고 싶어하던
그에게 또 다른 의미의 여자인 리사 라이언이
나타난다. 패티 스미스와 정반대 타입인
리사 라이언에게서 그는 지금껏
다른 여성에게서 발견하지
못한 남성성과 여성성을
동시에 발견하게 된다.
그녀를 모델로 한 사진을 보면
웨딩드레스를 입은 모습과 근육을 자랑하는 누드 까지
아주 다양한 시도를 한 것을 볼 수 있다.
그의 성에 대한 탐닉은
80년대 초 천형이라고 불리우는
에이즈의 창궐과 함께 막을 내린다.
그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서서히 에이즈로
죽어가면서 그도 불안에 떨게 된다. 특히 그의 오랜 연인이자
후원자였던 샘이 에이즈에 걸린 다음부터는 로버트에 대한 소문 역시
좋지 않았다. 결국 샘은 에이즈로 죽고 로버트에게 약 7백만 달러에 상당하는
거액의 유산을 남긴다.그러나 로버트 역시 에이즈에 걸려 언제 죽음의
사자가 찾아올지 모를 상황이 된다. 주변 사람들이 그에게
재산의 일부를 에이즈 퇴치 재단에 헌납할 것을
종용하지만 그는 아카데미상과 비슷한
사진관련 상을 만들고 싶어 처음에는
거절한다.
그러나 병세가
깊어지면서 마음이 변한
그는 일부를 에이즈 재단에 기증할 것을
허락한다.그가 에이즈에 걸렸다는 소문과 함께 오히려
그의 명성은 더해 가고 그의 회고전이 미국 전역을 순회하면서
열리게 되었다. 하지만 1988년 필라델피아의 현대예술관에서 열리기로한
전시회에 병이 깊어 참석할 수 없었던 로버트는 더욱더 우울증에
빠지게 된다. 결국 1989년 3월 9일 오전 5시, 그의 나이
42세라는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이한다.그가
죽은 뒤 "Perfect Moment" 이라는
이름으로 코코란 예술박물관에서
열리기로 한 그의 전시는
갑자기 취소된다.
이유는 게이나
새디즘 마조키즘과 관련된
풍기 물란 사진에 대해 후원을 할 수 없다는
정부측의 입장 때문이었다. 이를 계기로 어디까지 예술의
표현자유를 인정하느냐는 논란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그의 작품세계는 실로
다양하다고 할 수 있지만 계속 일관성 있게 작업을 한 것은 초상 사진이었다
그의 초상은 평범한 듯 하면서도 늘 남다르다. 상반신 사진을 추로
찍게 되는 초상사진의 특성상 단조로울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진은 인물의 특성이 살아 있다.
그는 한 사람의 초상 사진을 찍고 나서 가장
좋은 사진을 고를 때 그 선택권을
본인에게 주지 않고 자기가
했다고 한다.
사진가의
눈을 통해 선택된 것이야말로
가장 객관적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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