世宗(세종)때 治平要覽(치평요람)의 編纂(편찬)에 參與(참여)하여 武名(무명)을 떨친 盧叔仝(노숙동)이 大司憲(대사헌)을 지내고 淸白吏(청백리)에 祿選(녹선)되었으며, 그의 孫子(손자)盧文明(노문명)은 鄭汝昌(정여창)에게서 學文(학문)을 배우고 兄(형) 盧友良(노우량),아우 盧友英(노우영)과 함께 進士詩(진사시)에 合格(합격)하여 三珠(삼주)로 불리웠고 慕齋(모재) 金安國(김안국)의 推薦(추천)으로 顯陵參奉(현릉참봉)이 되었으나 己卯士禍(기묘사화)에 連累(연루)되었다.한편 盧友明(노우명)의 아들 4兄弟中(형제중)둘째 盧鎭(노진)은 30餘年間(여년간) 벼슬길에 있으면서도 淸白(청백)하기로 이름났다. 燃黎室記述(연려실기술) 宣祖朝名臣編(선조조명신편)에 그에 對(대)한 記錄(기록)이 아래와 같이 傳(전)한다. 들에 밭이 없고 서울에 집이 없었다. 여러 고을의 원을 지냈고, 嶺湖南(영호남)에서 두번 監使(감사)를 歷任(역임)하였으나 쓸쓸한 客舍(객사)에서 손님이 와도 담요 한 장 없이 지냈으며, 出世(출세)를 즐기지 않고, 恒常(항상) 隱退(은퇴)의 뜻이 있어 벼슬길에 나온 지 30年에 達(달)하였으나 벼슬한 날수는 3年을 차지 못하였다. 特(특)히 그는 아무리 높은 자리에 있었을 때도 남다른 척하지 않고 人望(인망)이 높았다고 激讚(격찬)하였으며, 모나게도 살지말되 또 時風(시풍)에 迎合(영합)하여 때에 따라 겸하였기로 일찌기 李栗谷(이율곡)도 處身(처신)하며 살지도 말라는 處世信條(처세신조)로 一生(일생)을 보냈다. 咸陽(함양)의 孝子(효자)로도 8道(도)에 소문났었고,當代(당대)의 大文章家(대문장가)로 宣祖(선조)의 스승이기도 했던 그는 曾祖父(증조부) 盧叔仝(노숙동)과 함께 淸白吏(청백리)에 올라 家門(가문)을 빛냈다. 그외 壬辰倭亂(임진왜란)때 東萊(城(동래성)을 지키다가 殉節(순절)한 盧蓋邦(노개방,계동의 6世孫(세손)과 仁祖(인조)때 士林(사림)의 尊敬(존경)을받아 八美君子(팔미군자)의 別號(별호)가 붙었던 盧亨夏[노형하, 盧鎭(노진)의 曾孫子]가 有名(유명)했고, 盧友良(노우량)의 6世孫(세손) 盧銓(노전)(郡守 盧洪基의 세째 아들)은 武科(무과)에 及第(급제)하고 咸鏡北道(함경북도)兵馬節度使(병마절도사)가 되어 軍備擴張(군비확장)과 邊邦警備(변방경비)에 눈부신 業積(업적)을 남겨 戶曹參判(호조참판)을 지낸 盧光斗(노광두)와 함께 名門(명문)의
傳統(전통)을 지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