孫敬源(손경원)의 曾孫(증손) 孫士晟(손사성)이 朝鮮(조선) 世宗(세종)때 訓民正音(훈민정음) 創製(창제)에 參與(참여)하고 鷄城君(계성군)에 封(봉)해졌으며,그의 아들 孫旭(손욱)과 孫昭(손소)의 兄弟(형제)가 世祖(세조)때 李施愛(이시애)의 亂(란)을 鎭壓(진압)하는 데 功(공)을 세워 家門(가문)의 기틀을 다지기 始作(시작)했다. 孫昭(손소)는 1459年(世祖5) 金宗直(김종직)과 함께 文科(문과)에 及第(급제)하고 主簿(주부)와 兵曹佐郞(병조좌랑)等(등)을 歷任(역임)한 後(후) 兄(형)인 嶺北御史(영북어사) 孫旭(손욱)과 함께 李施愛(이시애)의 亂(란)때 平征(평정)에 參與(참여)하여 孫旭(손욱)은 咸興(함흥)에서 殉節(순절)하였고, 그는 亂(란)을 平征(평정)한 後(후) 敵愾二等功臣(적개이등공신)으로 冊祿(책록)되어 內贍寺正(내섬시정)에 特進(특진),星州牧使(성주목사)와 工曹參議(공조참의)를 거쳐 鷄川君(계천군)에 封(봉)해졌으며,安東府使(안동부사)와 晋州牧使(진주목사)를 歷任(역임)하며 特(특)히 文章(문장)과 글씨로 名望(명망)이 높았다.
孫昭(손소)의 둘째 아들로 卓越(탁월)한 文章(문장)과 經倫(경륜)에 밝았던 孫仲暾(손중돈)은 일찍이 金宗直(김종직)의 門下(문하)에서 學文(학문)을 硏磨(연마)하고 1489年(成宗20) 式年文科(식년문과)에 及第(급제),藝文館奉敎(예문관봉교)를 始作(시작)으로 여러 淸宦職(청환직)과 梁山郡守(양산군수)를 지낸 後(후) 司僕寺正(사복시정)에 올라 燕山君(연산군)의 暴政(폭정)으로 諫官(간관)들이 거의 다 쫓겨날 때 罷職當(파직당)했으나 中宗反正(중종반정) 後(후)에 復職(복직), 尙州牧使(상주목사)로 나가 善政(선정)을 베풀어 住民(주민)들이 生祠堂(생사당)을 지어 그의 功德(공덕)을 追慕(추모)했으며, 1517年(中宗12年) 聖節使(성절사)로 明(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工曹(공조)와 吏曹(이조)의 判書(판서)를 지내고 都丞旨(도승지)를 3番(번
),大司諫(대사간)을 4番(번), 慶尙(경상),全羅(전라),忠淸(충청),咸鏡道(함경도
) 觀察使(관찰사)를 지내고 右參贊(우참찬)에 이르렀으며 淸白吏(청백리)에 祿選(녹선)되어 크게 名聲(명성)을 떨쳤다.
그 外(외) 正言(정언)을 지낸 孫會宗(손회종),府使(부사) 孫萬雄(손만웅),縣監(현감) 孫景翼(손경익),監察(감찰) 孫會慶(손회경),吏曹佐郞(이조좌랑) 孫秉周(손병주),弘文館校理(홍문관교리)孫相馹(손상일),孫耆永(손기영)等(등)이 有名(유명)했고,孫蕃(손번)은 殿試文科(전시문과)에 及第(급제)하여 司憲府持平(사헌부지평)과 軍器寺僉正(군기시첨정)을 지내고 編修事(편수사)가 되어 成宗實錄(성종실록)編纂(편찬)에 參與(참여)했으며 中宗(중종)때 成均館大司成(성균관대사성)에 이르렀다.
孫潤源(손윤원)은 軍資監(군자감)의 奉事(봉사)를 지내고 壬辰倭亂(임진왜란) 때 參戰(참전)하여 倉巖(창암) 戰鬪(전투)에서 많은 戰功(전공)을 세우고 壯烈(장렬)하게 殉節(순절)하여 義節(의절)의 家統(가통)을 세웠으며, 孫永坤(손영곤)은 孝行(효행)으로 이름을 떨쳤다. 孫宗老(손종로)는 光海君(광해군)때 武科(무과)에 及第(급제)했으나 仁穆大妃(인목대비: 宣祖의 繼妃, 永昌大君의 어머니)가 西宮(서궁)에 流廢(유배)되자 이를 慨嘆(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落鄕(낙향)했다가 仁祖反正(인조반정) 後(후)에 藍浦縣監(남포현감)을 지냈으며, 丙子胡亂(병자호란)때 兵馬節度使(병마절도사) 許完(허완)의 幕下(막하)로 들어가 利川(이천)의 雙嶺(쌍령)싸움에서 敵(적)과 對戰(대전)하다가 殉節(순절)하여 訓鍊院正(훈련원정)에 追贈(추증)되었고 正祖(정조)때 王命(왕명)으로 忠臣旌門(충신정문)이 세워졌다. 그밖에 鎭海縣監(진해현감)孫湜(손식),府使(부사) 孫鍾策(손종책),郡守(군수) 孫秉秀(손병수)等(등)이 慶州孫氏(경주손씨)를 빛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