孫翼淡(손익담)의 아들 孫景尙(손경상)이 高麗(고려)에서 나라에 功(공)을 세워月城君(월성군)에 封(봉)해지고, 孫子(손자) 孫術祖(손술조)가 兵部尙書(병부상서)로 平海君(평해군)에 封君(봉군)되어 家勢(가세)가 隆盛(융성)하게 되었으며 孫道津(손도진)의 아들 孫起貞(손기정)이 兵部尙書(병부상서)를 거쳐 銀靑光祿大夫(은청광록대부)에 이르러 크게 名聲(명성)을 떨쳤다.
高麗(고려) 元宗(원종)때 林衍(임연)의 亂(난)을 平征(평정)시켜 箕城侯(기성후)에 封(봉)해진 孫仁亮(손인량)이 뛰어났으며,孫得富(손득부)의 아들 孫永(손영)은 忠肅王(충숙왕)때 嘉靖大夫(가정대부)로 刑曹參判(형조참판)을 지내고 同知義禁府事(동지의금부사)에 追贈(추증)되어,旌善郡守(정선군수)를 歷任(역임)하고 議政府左贊成(의정부좌찬성)에 追贈(추증)된 孫密(손밀)과 함께 이름을 떨쳤다.
孫密(손밀)의 맏아들 孫仁孝(손인효)는 端宗(단종)때 生員試(생원시)에 一等(일등)으로 올라 將來(장래)가 屬望(촉망)되는 人材(인재)였으나 首陽大君(수양대군)이 어린 端宗(단종)을 몰아내고 王位(왕위)를 簒奪(찬탈)하자 이를 慨
嘆(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隱居(은거)하며 節義(절의)를 지키니 世上(세상) 사람들은 그를 東方淸節士(동방청절사)라 불렀다.
孫仁孝(손인효)의 同生(동생)孫舜孝(손순효)는 世祖(세조)때 重試文科(중시문과)에 及第(급제)하고 여러 官職(관직)을 거쳐 典翰(전한)兼(겸) 執義(집의)에 올라 17個(개)項目(항목)의 政策(정책)을 上疏(상소)하고 刑曹參判(형조참판)에 이르렀고, 特(특)히 成宗(성종)이 尹妃(윤비)를 폐위할 때 그 否當(부당)함을 極諫(극간)했다. 그後(후) 左贊成(좌찬성)이 되어 1487年(成宗18)食療撰要(식료찬요)를 撰進(찬진)했으며, 判中樞府事(판중추부사)에 이르러 櫃杖(궤장)을 下賜(하사)받았고 性理學(성리학)에 밝은 學者(학자)로 그림에도 뛰어나서 竹畵(죽화)에 一家(일가)를 이루었다.
孫舜孝(손순효)의 아들 孫澍(손주)는 成宗(성종)때 式年文科(식년문과)에 及第(급제)하고 掌令(장령)과 正言(정언), 修撰(수찬),副提學(부제학)等(등)을 거쳐
中宗(중종)때 刑曹參判(형조참판) 이 되고,1521年(中宗16)吏曹參判(이조참판)으로 賀尊諡使(하존시사)가 되어 明(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뒤에 禮曹判書(예조판서)와 右參贊(우참찬)을 歷任(역임)한 後(후)知中樞府使(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그밖의 人物(인물)로는 郡守(군수) 孫溥(손부)와 戶曹參判(호조참판) 孫軾(손식),參議(참의)孫胤善(손윤선)等(등)이 有明(유명)했으며,孫夢說(손몽열)의 아들 孫必大(손필대)는 仁祖(인조)때 式年文科(식년문과)에 及第(급제)하여 公淸道都事(공청도도사)와 司僕寺正(사복시정)을 지내고 知製敎(지제교)에 이르렀으며 詩文(시문) 이 卓越(탁월)하여 當代(당대)에 이름난 詩人(시인)으로 名望(명망)이 높아 平海孫氏(평해손씨)를 빛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