延日鄭氏(연일정씨)는 朝鮮時代(조선시대)에 5名(5명)의 相臣(상신)과 3名(3명)의 大提學(대제학)을 輩出(배출)하였다.
[監務公派]
朝鮮時代(조선시대) 中葉(중엽) 松江(송강) 鄭澈(정철)은 時調(시조)의 尹善道(윤선도)와 함께 우리 古典文學(고전문학)의 雙壁(쌍벽)으로 불리는 歌詞(가사)의 最高峰(최고봉)이다. 그는 當時(당시) 고개를 들기 始作(시작)한 黨爭(당쟁)에서 西人(서인)의 領首(영수)로 東人勢力(동인세력)과 끝까지 맞서 싸운 鬪士(투사)였고 左議政(좌의정)의 높은 벼슬에까지 올랐다. 그의 아들 鄭弘溟(정홍명)은 仁祖(인조)때 大提學(대제학)을 지냈으며, 鄭澈(정철)의 玄孫(현손)인 鄭澔(정호)는 英祖(영조)때 大提學(대제학)을 거쳐 領議政(영의정)에 올랐다.鄭澔(정호) 孫子(손자) 亦是(역시) 大提學(대제학)을 歷任(역임)하고 吏曺判書(이조판서)에 이르렀으며 曾孫(증손) 鄭履煥(정이환)은 參判(참판)과 提學(제학)을 지냈다.그밖에 高麗(고려) 恭愍王(공민왕)때 烏川君(오천군)에 封(봉)해진 鄭思道(정사도)와 朝鮮(조선) 仁祖(인조)때 大提學(대제학)을 지낸 鄭弘溟(정홍명), 英祖(영조)때 領議政(영의정) 鄭澔(정호),英祖(영조)때 右議政(우의정)鄭羽良(
정우량) 等(등)을 들 수 있다.
[知奏事公派]
忠臣(충신), 孝子(효자), 義人(의인)으로 일컬어지는 圃隱(포은) 鄭夢周(정몽주)는 나면서부터 어깨에 北斗七星(북두칠성)처럼 검은点(점)7個(7개)가 박혀있어
이웃사람들도 모두 큰 人物(인물)이 될것이라고 期待(기대)했다고 한다.9歲(9세
)때 집에서 부리는 女(여)종이 軍(군)에 나간 男便(남편)에게 便紙(편지)를 써 달라고 付託(부탁)하자 그는 그자리서 "구름은 모였다 흩어지고 달은찼다 이지러지지만 妾(첩)의 마음은 恒時(항시) 變(변)치 않습니다"라고 써주었다.짧은漢詩(한시)로 男便(남편)을 그리는 아내의 마음을 表現(표현)한 少年(소년)의才能(재능)에 글방 스승도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그는 24歲(24세)에 科擧(과거)에 及第(급제),56歲(56세)로 一生(일생)을 마칠때까지 기우는 民生(민생)을 求(구)하는 일에 熱(열)과 誠(성)을 쏟았다. 그밖에 顯宗(현종)때의 右議政(우의정)을 지낸鄭維成(정유성)과 鄭維成(정유성)의 孫子(손자)인 陽明學(양명학)의 巨星(거성) 鄭齊斗(정제두), 宣祖(선조)때 壬辰倭亂(임진왜란)을맞아 義兵(의병)을 일으킨 鄭大任(정대임),孝宗(효종)때 學者(학자) 鄭克後(정극후),高宗(고종)때 山水畵(산수화)에 能(능)했던 鄭文升(정문승)等(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