姓氏의 故鄕

延日 鄭氏(연일정씨) (627).

아까돈보 2010. 10. 19. 11:27

 

 

延日鄭氏(연일정씨,迎日烏川)
 

由來

 

 

延日鄭氏(연일정)씨는 始祖(시조)를 다르게하는 두個(개)의 派(파)가 있다.이 두派(파)는 新羅(신라)6部時代(6부시대)의 智伯虎(지백호)의 後孫(후손)으로 그 中間(중간) 系譜(계보)를 잃어버려 서로 寸數(촌수)를 헤아리지 못하고 族(족보) 및 宗親會(종친회)를 各各(각각) 다르게 하고 있다.新羅(신라)때 諫官(간관)鄭宗殷(정종은)을 都始祖(도시조)로하고 그 後孫(후손)인 鄭襲明(정습명)을 1世祖(1세조)로 하는 知奏事公派(지주사공파)와鄭克(정극유)를 1世祖(1세조)로 하는 監務公派(감무공파)가 있다. 鄭襲明(정습명)은 高麗(고려)毅宗(의종)때의 重臣(중신)으로 樞密院知奏事(추밀원지주사)를 지냈으며,그의 先代(선대)에 鄭宜卿(정의경)이 延日戶長(연일호장)을 지냈고,다시 延日縣伯(연일현백)에 (봉)해졌으므로 後孫(후손)들이 本貫(본관)을 延日(연일)(現迎日)로 하였다.그러나 本(본)고장인 烏川(오천)마을 이름을 따서 烏川(오천)으로 쓰기도 했으나 只今(지금)은 延日(연일)로 統一(통일)해서 쓰고있다.
 

▣ 人物

 

 

延日鄭氏(연일정씨)는 朝鮮時代(조선시대)에 5名(5명)의 相臣(상신)과 3名(3명)의 大提學(대제학)을 輩出(배출)하였다.

[監務公派]


朝鮮時代(조선시대) 中葉(중엽) 松江(송강) 鄭澈(정철)은 時調(시조)의 尹善道(윤선도)와 함께 우리 古典文學(고전문학)의 雙壁(쌍벽)으로 불리는 歌詞(가사)의 最高峰(최고봉)이다. 그는 當時(당시) 고개를 들기 始作(시작)한 黨爭(당쟁)에서 西人(서인)의 領首(영수)로 東人勢力(동인세력)과 끝까지 맞서 싸운 鬪士(투사)였고 左議政(좌의정)의 높은 벼슬에까지 올랐다. 그의 아들 鄭弘溟(정홍명)은 仁祖(인조)때 大提學(대제학)을 지냈으며, 鄭澈(정철)의 玄孫(현손)인 鄭澔(정호)는 英祖(영조)때 大提學(대제학)을 거쳐 領議政(영의정)에 올랐다.鄭澔(정호) 孫子(손자) 亦是(역시) 大提學(대제학)을 歷任(역임)하고 吏曺判書(이조판서)에 이르렀으며 曾孫(증손) 鄭履煥(정이환)은 參判(참판)과 提學(제학)을 지냈다.그밖에 高麗(고려) 恭愍王(공민왕)때 烏川君(오천군)에 封(봉)해진 鄭思道(정사도)와 朝鮮(조선) 仁祖(인조)때 大提學(대제학)을 지낸 鄭弘溟(정홍명), 英祖(영조)때 領議政(영의정) 鄭澔(정호),英祖(영조)때 右議政(우의정)鄭羽良(

정우량) 等(등)을 들 수 있다.

[知奏事公派]


忠臣(충신), 孝子(효자), 義人(의인)으로 일컬어지는 圃隱(포은) 鄭夢周(정몽주)는 나면서부터 어깨에 北斗七星(북두칠성)처럼 검은点(점)7個(7개)가 박혀있어

이웃사람들도 모두 큰 人物(인물)이 될것이라고 期待(기대)했다고 한다.9歲(9세

)때 집에서 부리는 女(여)종이 軍(군)에 나간 男便(남편)에게 便紙(편지)를 써 달라고 付託(부탁)하자 그는 그자리서 "구름은 모였다 흩어지고 달은찼다 이지러지지만 妾(첩)의 마음은 恒時(항시) 變(변)치 않습니다"라고 써주었다.짧은漢詩(한시)로 男便(남편)을 그리는 아내의 마음을 表現(표현)한 少年(소년)才能(재능)에 글방 스승도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그는 24歲(24세)에 科擧(과거)에 及第(급제),56歲(56세)로 一生(일생)을 마칠때까지 기우는 民生(민생)을 求(구)하는 일에 熱(열)과 誠(성)을 쏟았다. 그밖에 顯宗(현종)때의 右議政(우의정)을 지낸鄭維成(정유성)과 鄭維成(정유성)의 孫子(손자)인 陽明學(양명학)의 巨星(거성) 鄭齊斗(정제두), 宣祖(선조)때 壬辰倭亂(임진왜란)을맞아 義兵(의병)을 일으킨 鄭大任(정대임),孝宗(효종)때 學者(학자) 鄭克後(정극후),高宗(고종)때 山水畵(산수화)에 能(능)했던 鄭文升(정문승)等(등)이 있다.
 

▣ 科擧及第者(朝鮮時代)

 

  鄭淮(정회) : 文科 成宗7年(1476) 重試 一等壯元 及第
鄭澈(정철) (1536 丙申生) : 文科 明宗17年(1562) 別試 甲科 壯元及第
鄭宗溟(정종명) (1565 乙丑生) : 文科 宣祖25年(1592) 別試 甲科 壯元及第
鄭承明(정승명) (1604 甲辰生) : 文科 仁祖24年(1646) 式年試 甲科 壯元及第
鄭始大(정시대) (1615 乙卯生) : 文科 孝宗2年(1651) 別試 甲科 壯元及第
鄭道成(정도성) (1641 辛巳生) : 文科 顯宗11年(1670) 別試 甲科 壯元及第
鄭軾(정식) (1664 甲辰生) : 文科 肅宗25年(1699) 庭試 甲科 壯元及第
鄭遠達(정원달) (1735 乙卯生) : 文科 英祖32年(1756) 庭試3 甲科 壯元及第
鄭海觀(정해관) (1807 丁卯生) : 文科 高宗27年(1890) 耆老應制試 壯元及第
鄭光胤(정광윤) (1807 丁卯生) : 文科 中宗18年(1523) 謁聖試 乙科
等 모두 426名의 科擧 及第者가 있다.
(文科 111名, 武科 34名, 司馬試 277名, 醫科 1名, 陰陽科 2名, 律科 1名)

▣ 世居地

 

 

京畿道 龍仁市 慕賢面 陵院里


마을에서 1Km남짓한 文殊山(문수산) 기슭에 延日鄭氏(연일정씨)의 精神的(정신적) 支柱(지주인) 圃隱(포은) 鄭夢周(정몽주)의 墓所(묘소)가 있고 後孫(후손)들은 祖上(조상)의 墓(묘)를 지키며 2百餘年(백여년) 山(산)아래에서 살아온다. 마을의 40餘家口(여가구)가 鄭氏(정씨) 한집안으로 出世(출세)한 사람은 없지만 隣近(인근)에서는 兩班(양반)동네로 알아준다.
 

▣ 本貫 沿革

 

本貫所在地 : 慶尙北道 浦項市 迎日邑


慶尙北道(경상북도)東海岸(동해안)에 位置(위)한 浦項市(포항시)迎日邑(영일읍)으로 옛 地名(지명)은 延日(연일)이다. 新羅(신라)때에는 斤烏支縣(근오지현) 또는 烏良支縣(오량지현)이라 불렀다가 757年(新羅 景德王 16)에 臨汀縣(임정현)으로 改稱(개칭)하고, 義昌郡(의창군:興海)의 領縣(영현)이 되었다. 940年(高麗 太祖23)에 迎日縣(영일현:延日)로 改稱(개칭)되었고,1018年(顯宗9)에 慶州府(경주부)에 內屬(내속)되었다.1390年(恭讓王2)에 監務(감무)를 두면서 獨立(독립)하였다. 朝鮮初(조선초)에는 鎭(진)을 設置(설치)하고 兵馬使(병마사)가 知縣事(지현사)를 兼(겸)하게 하였다. 世宗代(세종대)에 다시 兵馬僉節制使(병마첨절제사)로 고쳤다가 後(후)에 縣監(현감)만을 파견하였다. 1732年(英祖8)에 通洋浦(통양포) 아래에 浦項倉(포항창)을 設置(설치)해 咸鏡道(함경도) 진휼(賑恤)의 바탕으로 삼게 함으로써 咸鏡道(함경도)와 慶尙道(경상도)를 連結(연결)하는 東海岸(동해안) 海路(해로)의 中心(중심)役轄(역할)을 하였다. 1895年(高宗 32)地方制度(지방제도) 改正(개정)으로 東萊府(동래부) 迎日郡(영일군)이 되었고, 1896年 慶尙北道(경상북도) 延日郡(연일군)이 되었다. 1914年 郡面廢合(군면폐합)으로 延日郡(연일군)은 延日面(연일면)等(등)5個面(5개면)으로 分面(분면)되어 興海(흥해)·張機(장기)·淸河郡(청하군)과 함께 延日郡(영일군)으로 統廢合(통폐합)되었고,1980年 延日面(연일면)이 延日邑(연일읍)으로 昇格(승격)하였다.1995年 迎日郡(영일군)이 浦項市(포항시)에 統合(통합)되었다.

 

▣ 人口數

 

統計廳(통계청)의 人口調査(인구조사)에 依(의)하면 延日鄭氏(연일정씨)는
1985年에는 摠 57,504家口 237,219名,
2000年에는 摠 67,418家口 216,510名이 있는 것으로 調査(조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