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萬義(김만의)의 아들 金學起(김학기)가 朝鮮(조선) 世祖(세조)때 別試文科(별시문과)에 及第(급제)하여 吏曹正郞(이조정랑)을 지낸 後(후)1478年(成宗 9年)
徐居正(서거정),崔淑精(최숙정) 等(등)과 함께 東文選[동문선 : 新羅(신라)에서부터 朝鮮(조선) 肅宗(숙종)때까지의 詩文(시문)을 모은 冊(책)] 編纂(편찬)에 參與(참여)하고,執義(집의)를 거쳐 大提學[대제학 : 弘文館(홍문관), 藝文館(예문관)의 正2品(정2품) 벼슬]에 올라 크게 名聲(명성)을 날렸으며,그의 同生(동생)金學益(김학익)은 縣監(현감)을 지냈다. 金台佐(김태좌)는 宣祖(선조)때 文科(문과)에 及第(급제)하여 僉知中樞府事(첨지중추부사)를 歷任(역임)했고,金天慶(김천경)은 1627年(仁祖5年)丁卯胡亂(정묘호란)이 일어나자 金應參(김응참), 金應哲(김응철) 等(등)과 함께 義兵(의병)을 일으켜 綾漢山城(능한산성)에서 壯烈(장열)하게 殉節(순절)하여 憲宗(헌종)때 通訓大夫(통훈대부)로 禮賓寺正(예빈시정)에 追贈(추증)되고 廓山(곽산)의 五烈祠(오열사)에 祭享(제향)되었다. 그外(외) 金德良(김덕량)이 1546年(明祖1年) 文科(문과)에 及第(급제)하고 監察(감찰)과 郡守(군수)를 지냈으며, 副護軍(부호군) 金彦沖(김언충)은 軍資監(군자감) 金繼老(김계로), 副摠管(부총관) 金德澤(김덕택),監察(감찰) 金卞赤(김변적) 等(등)과 함께 이름을 날렸다. 朝鮮(조선) 光海君(광해군)때 金龍(김용)은 明淸戰爭(명청전쟁)때 授明軍大將(수명군대장) 金應夏(김응하)의 左翼將(좌익장)으로서 右翼將(우익장)인 從姪(종질) 金武義(김무의)와 함께 蕃陽(심양)에 出戰(출전)하여 牛尾寨(우미채)에서 壯烈(장열)하게 戰死(전사)했고 後(후)에 廓山(곽산)의 五烈祠(오열사)에 祭享(제향)되었다.韓末(한말)에 우리 民族(민족)의 恨(한)을 아름다운 詩語(시어)로 노래한 素月(소월) 金正湜(김정식)(金素月)은 公州金氏(공주김씨)家門(가문)에서 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代表的(대표적)인 詩人(시인)으로 손꼽히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