姓氏의 故鄕

德山李氏(덕산이씨) (760).

아까돈보 2011. 1. 2. 00:39

 

 

德山李氏(덕산이씨)

 

▣ 由來

 

 

始祖(시조)  : 李存述(이존술)


始祖(시조) 李存述(이존술)은 高麗(고려) 明宗(명종)때 德豊(덕풍)(現 忠淸南道 禮山郡 德山面)戶長(호장)을 지내서 後孫(후손)들이 德山(덕산)을 本貫(본관)으로 하고 있다.그의 아들 李彦厚(이언후)는 野人征伐(야인정벌)에 功(공)을 세워 檢校大將軍(검교대장군)의 벼슬에 올 랐고,孫子(손자)李克甫(이극보)도 代(대)를 이어 檢校大將軍(검교대장군),曾孫(증손) 李赫(이혁)은 檢校軍器

監(검교군기감)等(등) 3代(3대) 將帥(장수)를 내며 家門(가문)의 기틀을 다졌다.
 

▣ 人物

 

 

高麗勳臣家門(고려훈신가문)의 義理(의리)와 忠節(충절)을 지켜 草野(초야)에 돌아간 李愉(이유)는 朝鮮時代(조선시대)에 朝鮮開國功臣(조선개국공신)의 한사람인 하륜(河崙)의 懇請(간청)에 못이겨 大護軍(대호군)으로 벼슬길에 나가 東北面(동북면)女眞族反亂鎭壓(여진족반란진압)에 功(공)을 세웠다.李愉(이유)는 이를 契機(계기)로 太宗(태종)때에 判尙州牧使(판상주목사),刑曺參判(형조참판)을 거쳐 咸吉道觀察使(함길도관찰사)로 在職中(재직중) 돌아가자,임금이 祭官(제관)을 보내 厚(후)히 葬事(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朝鮮時代(조선시대)에 40餘名(여명)이 文科及第(문과급제),陰私等(음사등)으로 벼슬에 올랐고 忠孝義烈(충효의열)의 家風(가풍)을 굳건히 지켜 朝廷(조정)에 널리 알려진 孝子(효자), 孝婦(효부), 烈女(열여)만도 10餘名(여명)을 헤아린다.特(특)히 中始祖(중시조) 李愉(이유)의 4兄弟(형제)와 그 아들 李師孟(이사맹)의 5兄弟(형제)가 모두 朝鮮初期(조선초기)부터 벼슬을 하며 忠誠(충성)을 하여 世宗大王(세종대왕)이 이 家門(가문)을 嘉尙(가상)히 여겨 "높은 집안의 많은 子孫(자손)들이 班列(반열)에 參與(참여)하여 政事(정사)가 밝게 펼쳐진다. (高門詵柱列朝端近日宣麻轉可觀)"라는 詩(시)한 首(수)를 下賜(하사)해 德山李氏(덕산이씨)의 큰 자랑이 되어있다.

近世(근세)엔 舊韓末(구한말) 中樞院(중추원) 醫官(의관) 李尙萬(이상만)의 아들 李宗源(이종원)이 英國(영국) 케임브리지大學에 留學中(유학중)乙巳保護條約(을사보호조약)이 締結(체결)되자 하와이로 亡命(망명)하여 安昌浩(안창호)

李承晩(이승만)과 獨立運動(독립운동)에 投身(투신)했으나 뜻을이루지 못한채 1905年 亡國(망국)의 恨(한)을 안고 自決(자결)했다. 그의 무덤과 墓碑(묘비)가 아직도 하와이 나루루公園(공원)에 있다고 한다.
 

▣ 科擧及第者(朝鮮時代)

 

  李震吉(이진길) (1561 辛酉生) : 文科宣祖19年(1586) 別試 乙科
李德全(이덕전) (1664 甲辰生) : 文科 肅宗13年(1687) 式年試 丙科
李蕃(이번) (1664 甲辰生) : 文科 燕山君10年(1504) 式年試 丙科
李師季(이사계) (1664 甲辰生) : 文科 世宗14年(1432) 式年試 同進士
李義臣(이의신) (1664 甲辰生) : 文科 明宗4年(1549) 式年試 丙科
李師孟(이사맹) (1664 甲辰生) : 文科 太宗14年(1414) 式年試 乙科
李曾門(이증문) (1664 甲辰生) : 文科 世祖5年(1459) 式年試 丙科
李師曾(이사증) (1664 甲辰生) : 文科 世宗1年(1419) 式年試 同進士
李景文(이경문) (1558 戊午生) : 武科 宣祖34年(1601) 式年試 丙科
李光翼(이광익) (1636 丙子生) : 武科 顯宗13年(1672) 別試 丙科
等 모두 16名의 科擧及第者가 있다.
(文科 8名, 武科 3名, 司馬試 5名)

▣ 世居地

 

 

慶北(경북)漆谷郡(칠곡군)東明面(동명면)鳳岩洞(봉암동)은 德山李氏(덕산이

씨)가 5百餘年(백여년) 터잡아 사는 옛마을이다.벼슬을 멀리하고 숨은 선비로 餘生(여생)을 마친 入鄕祖(입향조)李云顯(이운현)은 自身(자신)이 터잡았던 台峯山(태봉산)에 묻혔다.後孫(후손)들이 繁盛(번성)하면서 그의 뜻을 기려 台峯齊(태봉재)를 세우고 享祀(향사)를받들며 祖上(조상)을 섬기는 傳統(전통)을 잇고 있다.天惠(천혜)의 要塞(요새)인 台峯山城(태봉산성)이 北方(북방)을 가로막고 있는 이곳은 入鄕祖(입향조)李云顯(이운현)때부터 德(덕)을 崇尙(숭상)하는 家風(가풍)이 이어져 後孫(후손)들이 利害關係(이해관계)에 얽히거나 是是非非(시시비비)를 가려본 일이 없는 것이 家門(가문)의 傳統(전통)이다.
 

▣ 本貫沿革

 

 

本貫所在地 : 忠淸南道禮山


德山(덕산)은 忠淸南道(충청남도)禮山郡(예산군)에 屬(속)한 地名(지명)으로 本來(본래)는 德豊(덕풍)·伊山(이산)等(등)두개 縣(현)을 合(합)한 名稱(명칭)이다.伊山縣(이산현)은 百濟(백제)때는 馬尸山郡(마시산군)이라 불리우다가 757年(新羅景德王16)에 伊山郡(이산군)으로 바뀌어 熊州(웅주:公州)가 管轄(관할)하였고, 今武縣(금무현)과 目牛縣(목우현)이 伊山郡(이산군)의 領縣(영현)이 되었다. 1018年(顯宗9)에는 洪州(홍주:忠淸南道 洪城郡)의 貫轄(관할)에 있다가 後(후)에 監務(감무)를 둠으로써 獨立(독립)하였다.德豊縣(덕풍현)은 百濟(백제)의 今物縣(금물현)을 新羅(신라)景德王(경덕왕)때 今武縣(금무현)으로 改稱(개칭)하였고,940年(高麗 太祖23)에 德豊縣(덕풍현)으로 바꾸어 伊山縣(이산현)과 함께 洪州(홍주)의 屬縣(속현)이 되었다가 1175年(明宗2)에 監務(감무)를 두면서 獨立(독립)하였다.1405年(太宗5)에는 두개縣(현)을 倂合(병합)하여 德山縣(덕산현)을 만들었고,1828年(純祖28)에 德山郡(덕산군)으로昇格(승격)하였다.1895年(高宗32)地方制度(지방제도)改正(개정)으로 洪州府(홍주부)에 所屬(소속)되었고,1896年에 忠淸南道(충청남도)에 所屬(소속)되었다.1914年 郡面廢合(군면폐합)으로 德山面(덕산면)으로 縮少(축소),廢止(폐지)되어 只今(지금)은 禮山郡(예산군)에 屬(속)한 德山面(덕산면)으로 남아 있다.
 

▣ 人口數

 

 

統計廳(통계청)의 人口調査(인구조사)에 依(의)하면 德山李氏(덕산이씨)는
1985年에는 摠 1,732家口 7,355名,
2000年에는 摠 2,215家口 7,198名이 있는 것으로 調査(조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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