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麗勳臣家門(고려훈신가문)의 義理(의리)와 忠節(충절)을 지켜 草野(초야)에 돌아간 李愉(이유)는 朝鮮時代(조선시대)에 朝鮮開國功臣(조선개국공신)의 한사람인 하륜(河崙)의 懇請(간청)에 못이겨 大護軍(대호군)으로 벼슬길에 나가 東北面(동북면)女眞族反亂鎭壓(여진족반란진압)에 功(공)을 세웠다.李愉(이유)는 이를 契機(계기)로 太宗(태종)때에 判尙州牧使(판상주목사),刑曺參判(형조참판)을 거쳐 咸吉道觀察使(함길도관찰사)로 在職中(재직중) 돌아가자,임금이 祭官(제관)을 보내 厚(후)히 葬事(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朝鮮時代(조선시대)에 40餘名(여명)이 文科及第(문과급제),陰私等(음사등)으로 벼슬에 올랐고 忠孝義烈(충효의열)의 家風(가풍)을 굳건히 지켜 朝廷(조정)에 널리 알려진 孝子(효자), 孝婦(효부), 烈女(열여)만도 10餘名(여명)을 헤아린다.特(특)히 中始祖(중시조) 李愉(이유)의 4兄弟(형제)와 그 아들 李師孟(이사맹)의 5兄弟(형제)가 모두 朝鮮初期(조선초기)부터 벼슬을 하며 忠誠(충성)을 하여 世宗大王(세종대왕)이 이 家門(가문)을 嘉尙(가상)히 여겨 "높은 집안의 많은 子孫(자손)들이 班列(반열)에 參與(참여)하여 政事(정사)가 밝게 펼쳐진다. (高門詵柱列朝端近日宣麻轉可觀)"라는 詩(시)한 首(수)를 下賜(하사)해 德山李氏(덕산이씨)의 큰 자랑이 되어있다.
近世(근세)엔 舊韓末(구한말) 中樞院(중추원) 醫官(의관) 李尙萬(이상만)의 아들 李宗源(이종원)이 英國(영국) 케임브리지大學에 留學中(유학중)乙巳保護條約(을사보호조약)이 締結(체결)되자 하와이로 亡命(망명)하여 安昌浩(안창호)
李承晩(이승만)과 獨立運動(독립운동)에 投身(투신)했으나 뜻을이루지 못한채 1905年 亡國(망국)의 恨(한)을 안고 自決(자결)했다. 그의 무덤과 墓碑(묘비)가 아직도 하와이 나루루公園(공원)에 있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