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堅(이견)의 아들 挺林(정림)이 黃海道(황해도)安岳地方(안악지방)에 뿌리를
내리고 定着(정착)世居(세거)하면서 家勢(가세)를 일으켰다.3世(세)李義萬(이의만)은 高麗末(고려말)"忠臣(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며 太祖(태조
)李成桂(이성계)를 反對(반대)한 結果(결과) 禍(화)를 입어 昌原(창원)으로 避(피)하여 世居地(세거지)를 이루었다.4世(세)인 두兄弟(형제) 李興富(이흥부)
,李興仁(이흥인)은 各各(각각) 李興富(이흥부)는 官知兵馬使(관지병마사)로 密城(밀성)에서 倭寇(왜구)를 擊滅(격멸)하고 大勝(대승)을 이루었고 李興仁(이흥인)亦是(역시) 官知兵馬使(관지병마사)로 晉州(진주)萬戶(만호)口羅(구라)에 侵犯(침범)한 倭寇(왜구)를 擊滅(격멸)하고 使節(사절)큰功(공)을 세웠다.壬辰倭亂時(임진왜란시)李雲起(이운기)의 同生(동생)李雲長(이운장)은 義兵將(의병장)으로 鼎巖津(정암진)에서 倭敵(왜적)을 殲滅(섬멸)하고 戰死(전사)하여 宜寧郡民誠金(의령군민성금)으로 鼎巖津(정암진) 戰死地(전사지)에
"殉節戰跡碑(순절전적비)를 建立(건립)했다.李潛(이잠)은 晉州城(진주성)을 死守(사수)하다가 倭敵(왜적)과 擊戰後(격전후) 殉節(순절)하여 晉州(진주)
彰烈祠(창열사)에 位牌(위패)를 모셨다.
李鉉祐(이현우)는 獨立思想(독립사상)으로 倭人(왜인)을 排擊(배격)하다가 癸未年(계미년) 7月 5日 日本(일본)警察(경찰)에 逮捕(체포)되어 投獄中(투옥중
) 甚(심)한 毆打(구타)에도 大韓民國萬歲(대한민국만세)를 부르짓다가 乙酉年(을유년)8月15日 出獄(출옥)하였으나 甚(심)한 痛症(통증)으로 52歲(세)로 別世(별세)했다. 또한 舊韓末(구한말)開城(개성) 李箕浩(이기호)의 아들로 태어나 6.25때 雲峰(운봉) 飛行機事故(비행기사고)로 殉職(순직)한 李龍文(이용문)將軍(장군)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