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풍경

스리랑카, 시기리야 (세계문화유산).

아까돈보 2011. 5. 8. 20:34

 

 

 

스리랑카의 시기리야(세계 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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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리야[Sigiriya]

스리랑카 중부에 있는 유적지.

이곳은 6세기경 절벽 위에 세워진 사자산(獅子山)이라는 고대 성채의 유적들로 이루어져 있다. 성채가 세워진 암석절벽은 경사가 급하며 상단부가 양쪽으로 돌출되어 있다. 정상부의 해발고도는 349m이며, 주변 평야를 기준으로 한 높이는 180m에 이른다. 477년에 카시야파 1세는 적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정상부의 평지에 궁전을 세웠다. 정상에 오르려면 거대한 사자(sinha)의 벌어진 입처럼 생긴 입구와 목구멍처럼 생긴 좁은 통로(giriya)를 거쳐야만 한다. 시기리야라는 이름은 사자산 꼭대기로 연결되는 통로 모양에서 유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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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가 정한 세계문화유산  스리랑카의 SIGIRIYA(시기리야).
Kasyapa왕 시대에 18년 왕치에 7년동안 지었다는 데 한판의 큰 바위에 조각한 것입니다.
3개의 정원이 있고 물을 이용하여 만든 The Water Garden,돌로 만든 The Boulder Garden, 계단식 The Terraced Garden이 멋지게 펼쳐졌습니다.
코끼리, 사자, 코브라 3개의 동물상이 있으며 여름궁, 겨울궁, 5세기에 분수시설 까지.정말 상상할 수 없는 The Mirro Wall에 비쳤다는 Fresco는 여체의 나신들이 즐비했습니다.
역사학적으로 건축학적으로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세계 8대 불가사의 시기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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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 지도 입니다. 문화삼각지대란 세 도시를 이어보니 삼각형이 되어서 그렇게 명칭으 붙였습니다. 고대 스리랑카의 문화 즉 불교 유적이 고스란히 숨쉬고 있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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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리야 록은 산정상에 왕궁터가 남아 있는데 그 모습 전체를 담을려면 항공기를 동원해서 사진을 찍어야 합니다. 이후 보시는 시기리야 록의 전체 모습을 담은 사진은 모두다 항공기에서 찍은 사진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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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밑으로 보이는 잘 정돈된 건물들은 바위산을 오르기 위해서 입장을 하면 바로 나타나는 지상에 건설된 유적의 모습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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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산 중간쯤에서 바라본 지상의 잘 정된 유적... 시기리야 록 으로 오르기 전에 넓게 정원처럼 잘 정돈되어 있습니다. 조그맣게 관광객들이 오고 가시는 것이 보이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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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방면에서 찍은 바위산의 모습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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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산 중간쯤 보이는 광장의 유적지는 정상에 있는 왕궁으로 오르는 문을 사자의 발톱으로 장식한 입구가 있는 곳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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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사장가 입을 벌리고 있는듯한 전체 모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사람이 사자입으로 들어가는 형상이었겠지요.
지금은 올라가는 계단과 발톱모양의 발만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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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모습 입니다. 바위를 중간쯤 올라오다 보면 이렇게 정상에 있는 궁전으로 오르는 넓은 지역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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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문을 통해서 정상으로 올라가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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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에서 바위로 오러는 곳곳에는 계단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설명이 지상에서 바위로 올라가는 순서대로 되지 않고 위 사자문 입구부터 된 것 같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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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 옆구리로 길이 나 있습니다.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성을 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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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를 올라가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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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에서 바라다 본 모습.바위 옆으로 길이 나 있으며 길게 성을 쌓아서 사람들이 떨어지지 않게 보호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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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시기리야 록을 세계적인 명물로 만든 프레스코화의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감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상에서 계단을 다 올라가서 바위옆으로 난 길이 나타나면 바로 바위에 그려진 18명의 여인들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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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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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에 남아 있는 왕궁터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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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곳은 왕궁이 세워지기 전에는 수도승들의 수행터로 알려져 있었다고 합니다.
11년간의 역사가 끝난뒤 다시 수행승들의 수행터로 되돌아 왔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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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앉은 자리라고 합니다. 돌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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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mbulla에서 북동으로 22km 떨어진 Sigiriya에 위치한 거대한 바위 요새는 스리랑카의 주요 볼거리 중의 하나이면서 문화삼각지(그 외 Polonaruwa, Anuradhapura)의 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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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해지는 이야기로는…

477년 후궁의 아들(? Palace consort) Kasyapa가 그의 아버지 Anuradhapura의 왕 Dhatusena를 폐위시키고 산채로 벽에 가두었다. Dhatusena에게는 복수를 맹세하면서 India로 날아간 아들(by his true queen)이 하나 더 있었는데, Kasyapa가 이를 두려워 하여 Sigiriya의 거대한 바위 위에 난공불락의 요새를 지었다고 한다.
드디어 491년 그 아들이 복수를 하러 왔는데, Kasyapa는 요새에 숨어있지 않고 그의 코끼리 부대의 선봉에 섰다. Kasyapa는 이복동생이 이끄는 군대의 측면을 치려 하였는데, 방향을 잘못 잡아서 그만 늪에 빠져 버렸다. (저런~) 그의 군대는 그를 구하지 않았고, 거기서 그는 죽었다.
후에 Sigiriya는 승려들의 은신처가 되었으며, 16, 17세기에는 Kandyan 왕조의 전초 지점이었으나 폐허로 변했다가 영국 식민지 기간에 고고학자들에 의해 재발견되었다.
Sigiriya를 단지 요새로만 설명하기에는 타당하지 않다. Kasyapa는 바위의 200m 꼭대기에 우기를 보낼 궁을 지었다. 일종의 5세기 펜트하우스. 또한 Sigiriya는 중요한 도시 지점으로 고대의 건축, 공학, 도시 계획, 수력 기술, 정원술과 예술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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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를 올라가는 길의 절반쯤의 나선형 계단은 반듯한 바위 표현 속에 감춰진 갤러리로 통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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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영국 고고학자가 2개의 거대한 사자 발을 발굴했다. 과거에는 바위의 끝에 벽돌 모양의 사자가 있어서 정상으로 향하는 길이 '사자의 발'에서 '사자의 입'으로 들어 가는 것과 같았다고 한다. 지금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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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의 정상은 약 1.6헥타르에 이른다. 한 때 이곳은 건물들로 덮여 있었으나 현재는 그것들의 최하부만 남아있다. 정상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이곳이 요새라기 보다는 궁에 가깝다는 것을 설명하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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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m*21m 이르는 거대한 인공연못은 비록 그것이 물탱크로만 쓰였다고 해도 현대의 수영장처럼 보여진다

 

 

도대체 누가, 왜 이 200m가 넘는 바위 꼭대기에 왕궁을 지었을까. 5세기 당시 아누라다푸라를 지배하던 다투세나왕의 장남 카샤파는 아버지를 시해하고 왕위를 찬탈한다. 카샤파는 왕족 출신 어머니를 둔 이복동생 목갈라나와 달리 평민 출신 어머니를 둔 탓에 동생에게 왕위가 돌아갈 것을 몹시 우려했던 것. 복수를 다짐한 목갈라나가 인도로 건너가 군대를 키워 반격을 해오자 카샤파는 스스로를 유폐시켰던 이곳에서 자결로 생을 마감한다.

이곳이 세계적인 명소가 된 것은 스리랑카의 대표적인 예술작품으로 평가받는 시기리야 벽화 덕분이다. 벽화를 보려면 바위산 입구에서 낭떠러지 바위틈에 쇠줄을 매달아 만든 원통형 철망이 둘러쳐진 철제 계단을 20분 정도 올라야 한다. 강한 바람을 온몸으로 맞아가며 위험천만한 철제 계단을 오르면 가슴을 훤히 드러낸 그 유명한 시기리야 벽화 미인이 시간을 뛰어넘어 미소로 반긴다. 시기리야 벽화는 카샤파왕이 부왕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왕의 시녀들이 압 살라라는 요정들을 시중들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가슴을 드러낸 미인이 왕족이고 옷을 입은 미인은 시녀라 전해진다. 이 시기리야 미인들은 당초 500명이 넘었다는데 지금은 훼손돼 18명의 모습만이 남아 있다.

시기리야 벽화 아래쪽으로 약 3m 높이의"거울벽"이라 불리는 회랑 벽이 이어진다. 달걀 흰자와 꿀, 석회 등을 이겨 칠했다는‘거울 벽’은 평소에도 은은하게 반짝거리지만 햇볕을 받으면 환상적인 모습으로 빛난다. 벽에는 역대 왕조의 흥망을 노래한 서사시와 시기리야 벽화의 여인을 칭송하는 시들이 가득 새겨져 있다.

왼쪽으로 계단을 계속 오르다 보면 평평한 바위 광장이 나온다. 그 입구는 사자의 발톱 모양을 하고 있다. 처음에는 사자의 다리와 머리 모양까지 완벽해 왕궁에 오를 때면 마치 사자에게 삼켜지는 듯한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고 한다. 철제 계단을 통해 거의 60도는 될 듯한 아슬아슬한 경사면을 10여분 정도 더 오르면 왕궁이 있는 정상이 펼쳐진다. 1.6ha 면적의 궁전과 연회장, 수영장, 각종 주거지 등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200여m 높이의 바위 꼭대기에 수영장이라니? 적지 않은 물이 수영장에 고여 있다. 이 물은 지상에서 공급된다고 하는데 그 방법이나 수로를 찾지 못한 채 지금껏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이곳에 서면 산 아래 밀림이 한눈에 들어온다. 화창한 날에는 아누라다푸라의 루완웰리세야 대탑까지 보인다고 한다. 권력을 얻기 위해 천륜을 어긴 카샤파는 암벽 꼭대기에서 항상 불안과 초조에 떨며 지내야 했을 것이다. 절벽 위에 왕궁을 짓고 고민 많은 왕을 모셔야 했던 수많은 스리랑카인들의 한숨과 탄식을 전해주듯 사람을 날려버릴 듯한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었다.

스리랑카는 ‘인도의 눈물’이 아니다. 찬란한 고대 불교문화의 정신이 흐르는 불교 성지와 천혜의 자연관광지로 각광받는 보석으로 빛나고 있다.

스리랑카에는 총 일곱(7)의 세계문화유산이 unesco 에 등록되어 있습니다. 그중 "시기리야 록" 을 제외하고는 모두다 불교와 관련된 유적들 입니다. 물론 "시기리야" 에 유적을 남긴 왕조도 불교를 믿는 싱할라 족들이니까 직간접적으로 불교와 관련이 있다고 봐야 겠지요.

시기리야 rock (록. 바위) 을 위해하기 위해서 간단한 역사 이야기

서기 459-477 년까지 스리랑카를 통치했던 "다투세나 왕(Dhatusena)에게는 장남 이었던 "카사파(Kasyapa)" 와 배다른 이복동생인 "목갈라나(Moggallana)" 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왕위 계승이 혹 배다른 이복동생에게 돌아갈까 두려워 한 "카사파"는 아버지인 "다투세나" 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이복동생인 "목갈라나"는 이웃나라 인도로 망명을 했습니다.

아버지를 살해하고 왕위를 빼앗은 "카사파" 왕은 이곳 시기리야에 있는 바위산 위에다 왕궁을 건설하고 이곳 산위로 왕좌를 가져온채 11년간을 지냈습니다. 그리고 인도로 망명한 "목갈라나" 가 군대를 이끌고 "카사파"를 쳐부수기 위해서 싸움이 시작 되었는데 결과적으로 카파사 왕이 패하고 죽음을 당했습니다.

이후 싸움에서 승리한 "목갈리나" 가 다시 왕좌를 기존의 "아누라다푸라" 라는 곳으로 가져 가고 이 왕궁은 일반인들의 기억속에 잊혀 졌습니다.

시기리야 록을 더욱더 유명하게 만든것은 이 바위 중턱에 새겨진 아름다운 18명의 여인들의 벽화 그림 때문 입니다. 지금도 그 그림은 마치 살아 있는듯 생동감을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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