柳(유)氏의 本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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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55개의 본관에 인구는 319,001명이 있습니다.(2000년 인구조사 기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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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化柳氏(문화유씨)
九月山(구월산) 아래 墨方洞(묵방동)에 隱身(은신)하고 祖母(조모)님의 姓(성)인 楊氏(양씨)를 摸倣(모방)하여 柳(류)로 고치고 이름을 穡(색), 아들은 叔(숙)으로 고쳤다.穡(색)의 6世孫(6세손)海(해)가 王建(왕건)이 後百濟(후백제)를 征伐(정벌)할 때 私財(사재)를 털어 車(차)1千輛(천량)을 制作(제작),軍糧(군량)과 함께 補給(보급)하여 高麗(고려) 創業(창업)에 功(공)을 세우고 翊贊壁上功臣(익찬벽상공신)에 올랐으며,太祖(태조) 王建(왕건)은<以車爲達(이차위달:車로써 目的을 達成)>의 뜻으로 <車達(차달)>이란 이름을 下賜(하사)했다고한다.車達(차달)의 두 아들 中(중)長男(장남)孝全(효전)은 本姓(본성)인 車氏(차씨)를 잇게하여 宗籍(종적)을 延安(연안)으로 하게 했으며,次男(차남) 孝金(효금)에게는 柳氏(류씨)를 繼承(계승)하고 本姓(본성)[本貫(본관)을 儒州(유주)]로 하였으나地名(지명)의 變遷(변천)으로 儒州(유주)가 文化(문화)로 改稱(개칭)됨에 따라 文化(문화)로 稱貫(칭관)하게 되었다. 三韓甲族(삼한갑족)으로 일컬어진 文化柳氏(문화유씨)의 人脈(인맥)으로는 少監(소감)寵(총:始祖의 6世孫)의아들 公權(공권)이 高麗(고려)明宗(명종)때正堂文學(정당문학)과 參知政事(참지정사)等(등)을 지내고 文章(문장)과 글씨로 名聲(명성)을 떨쳤으며,그의 아들 彦琛(언침)과 澤(택)으로부터 크게 두 갈래로 갈라져서 文化柳氏(문화유씨)의 兩大山脈(양대산맥)을 이루게 되었다. 上將軍(상장군) 彦琛(언침)의 後孫(후손)에는 判官(판관) 安澤[안택:上護軍(상호군) 湜(식)의아들]의 아들 寬(관)이 有名(유명)했다.1371年(恭愍王 20) 文科(문과)에 及第(급제)한 그는 高麗朝(고려조)에서 20年間(년간) 벼슬하였고, 朝鮮(조선)이 開國(개국)된 後(후)1393年(太祖 2)兵曹議郞(병조의랑)으로 出仕(출사)하여 1429年(世宗 9)81歲(세)로致仕(치사)할 때까지4代(대)의 王朝(왕조)를 거치면서 35年間(년간)을 入仕(입사)하여, 都合(도합)55年同安(년동안)主要官職(주요관직)을 지낸 賢臣(현신)으로名望(명망)이 높았다. 特(특)히 그는 右議政(우의정)에 오를 때까지도 東大門(동대문)밖에서 울타리도 없는 草家(초가)에 살며 淸白(청백)함으로 歷史(역사)를 繡(수)놓았다. 그의 性格(성격)을 잘 아는 太宗(태종)이 낮에가서 울타리를 하면 못하게 할것이므로 繕工監(선공감)을 시켜 밤에 몰래 가서 울타리를 둘러놓게했다는 記錄(기록)이 傳(전)하며,집이 너무허술하여 장마철이면 지붕이 새어 방안에 雨傘(우산)을 펴들고 夫人(부인)과 더불어 비를가리고 있으면서 "雨傘(우산)이 없는 집에서는 이 장마철을 어떻게 견디어 내나"하니,이에 夫人(부인)은"雨傘(우산) 없는 집에는 다른 마련이 다 돼 있답니다"하여,그가 웃었다는 逸話(일화)가 有名(유명)하다 . 그의 집에는 꽃나무 두어 포기가 있을 뿐이고,집에 있을 때는 맨발에 짚신을끌고 손님을 맞이했으며 호미를 들고 밭에 나가 김을 매기도 하였다. 손님이 와서 술을 待接(대접)할 때는 濁酒(탁주) 한 항아리를 뜰 위에다 두고는 한 늙은 女종으로하여금 사발 하나로서 술을 치게 했고 술안주는 기껏 소금에 저린 콩자반이었다.그가 죽었을때 전곡이 하나도없이 親知(친지)들이 추렴해서 葬事(장사)를 지냈을 程度(정도)였으며, 집이 너무 초라하다고 사람들이 말했을 때"雨傘(우산)에 비하면 이것도 過濫(과람)하다"고 했다고 한다. 寬(관)의 아들 中(중)季聞(계문)은 世宗(세종)때 判漢城府事(판한성부사)와 刑曹判書(형조판서)를거쳐 개성부 開城部留守( 유수)를 지냈으며, 글씨에 뛰어나 太宗(태종)이 죽자 冥福(명복)을 빌기 爲(위)하여 王命(왕명)으로 安止(안지),(崔興孝(최흥효)等(등)과 함께 金字法華經(금자법화경)을 썼다. 그의 아들 權(권)은 參判(참판)을 지내고,孫子(손자)聃年(담년)은 中宗(중종)때兵曹判書(병조판서)를 거쳐 漢城府判尹(한성부판윤)에 올랐다. 父子政丞(부자정승)으로 有名(유명)한 尙運(상운)은 佐郞(좌랑) 誠梧(성오)의 아들로 肅宗(숙종)때 文臣庭試(문신정시)에 壯元及第(장원급제)하여大司諫(대사간)과 左, 右議政(좌우의정)을 거쳐 領議政(영의정)에 올랐으며 글씨로 이름을 떨쳤고, 그의 아들 鳳輝(봉휘)는 英祖(영조)때 <小論四大臣(소론사대신)>의 한 사람으로 左議政(좌의정)에 이르렀다.한편 判禮部事(판예부사) 公權(공권)의 둘째 아들 澤(택)의 人脈(인맥)으로는 그의 아들 璥(경)이 忠烈王(충렬왕) 때 贊成事(찬성사)와 判典理司事(판전리사사)를 거쳐僉議中贊(첨의중찬)으로 致仕(치사)했으며,文章(문장)이 뛰어나 神宗(신종),熙宗(희종),康宗(강종),高宗(고종)等(등) 4代의實錄(실록)編纂(편찬)에 參與(참여)했으며 門下(문하)에서 安珦(안향), 李混(이혼)等(등) 많은 人材(인재)를 輩出(배출)시켰다. 卿(경)의 孫子(손자) 墩(돈)은 忠宣王(충선왕)때 僉議贊成事(첨의찬성사)로 始寧君(시령군)에 封(봉)해졌으며, 그의 孫子(손자) 曼洙(만수)는 威化島(위화도)回軍(회군)때 功(공)을 세우고 一等功臣(일등공신)으로 贊成事(찬성사)에올랐으나 第1次王子(왕자)의 亂(란)때 芳遠(방원)에게 鄭道傳(정도전)과 함께 禍(화)를 當(당)했다.1415年(太宗16)左議政(좌의정 )을 거쳐 領議政(영의정)에올랐던 廷顯(정현)은 文化公(문화공) 鎭(진)의 아들로 世宗(세종)이 卽位(즉위)하자 三軍都統使(삼군도통사)로 日本(일본)對馬島(대마도) 征伐(정벌)에 參戰(참전)했으며 1426年(世宗8) 다시 左議政(좌의정)에 이르러 致仕(치사)한 後(후) 4日만에 죽었다. 太宗(태종)과 世宗(세종)의 두터운 信任(신임)을 받았던 그는 世宗(세종)이 上王(상왕:太宗)께 盞(잔)을 올릴 때 領敦寧(영돈령)으로 모시고 있었는데,太宗(태종)이 가죽 한 장을 下賜(하사)하면서"내가 변변치못한 物件(물건)을 卿(경)들에게 주는뜻은 가죽과 같이 長壽(장수)하라는 뜻이다"했으며,술을 마시면서 玉杯(옥잔)에다 술을 부어주며 一體同心(일체동심)의 뜻을 傳(전)했다.廷顯(정현)이 죽었을 때 世宗(세종)은 흰道袍(도포)에 검은帽子(모자)와 검은 띠를 매고 百官(백관)을 거느리고禁川橋(금천교)帳幕(장막)에 나와 哭(곡)을 했다고 한다.縣監(현감) 函(함)(贊成事晩洙의重孫)의 아들自湄(자미)는 世祖(세조)때 監察(감찰)을 지내다가 死六臣(사육신)이禍(화)를입자 病(병)을 핑계로 官職(관직)에서 물러나山水(산수)를 放浪(방랑)하였고,成三問(성삼문)의 딸을 몰래 데려다 숨겨서길러子婦(자부)로 삼았으며, 黃海道(황해도)首陽山(수양산)神光寺(신광사)에서 餘生(여생)을 보내다가 죽음에 이르러 遺言(유언)하기를"내가 臣下(신하)로서 임금에게 그리고 祖上(조상)에게 아무런 보람있는 일도못하고 죽지 못해 살았으니 先塋(선영)곁에 뭍지도 말고, 또 碑石(비석)도 세우지 말라 "고懇曲(간곡)히付託(부탁)하였다.死六臣(사육신)으로 有名(유명)한誠源(성원)은世宗(세종)때 文科(문과)에 及第(급제)하고 이듬해著作郞(저작랑 )이 되어醫方類聚(의방유취) 編纂(편찬)에 參與(참여)했으며集賢殿學士(집현전학사)로 世宗(세종)의 寵愛(총애)를 받았다.1453年(端宗1)首陽大君(수양대군)이金宗瑞(김종서) 等(등)을 殺害(살해)하고端宗(단종)에게 거짓으로 報告(보고)한 後(후)이 擧事(거사)를 成功(성공)시킨 功臣(공신)들을 表彰(표창)토록 하는데,首陽(수양)의 脅迫에못이겨 靖難功臣(정난공신)을錄勳(녹훈)하는 敎書(교서)를쓰고 집으로 돌아와 홀로慟哭(통곡)했다고 하며,成三問(성삼문),朴彭年(박팽년)等(등)과 함께 端宗復位(단종복위)를 꾀하다가綻露(탄로)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洗馬(세마)思恭(사공:滿洙의 曾孫)의 아들洵(순)은燕山君(연산군) 때 領議政(영의정)으로中宗反正(중종반정)에 功(공)을세워靖國二等功臣(정국이등공신)에올라文城府院君(문성부원군)에 封(봉)해졌으며,文章(문장)과詩賦(시부)에 뛰어나 王命(왕명)으로徐居正(서거정),盧思愼(노사신) 等(등)과 함께聯珠詩格(연주시격)을 우리말로 飜譯(번역)했다.일찍이 成宗朝(성종조)에副提學(부제학)으로 있으면서 임금이美人圖(미인도)를 내놓고 詩(시)를지어 올리라는 御命(어명)을 내렸을때君王自是疎聲色(군왕자시소성색)(임금이 스스로 女色(여색)을멀리하여 展畵猶應寄一(전화유응기일)(그림을 펴보고는 눈살을 찌푸린다)고 하자 成宗(성종)은 稱讚(칭찬 )하고屛風(병풍)을 만들게 하여 戒色(계색)의 本(본)을 삼았다고 한다.仁宗(인종) 때左議政(좌의정)을 歷任(역임)한灌(관)은 太祖(태조)때의 右議政(위의정)亮(양)의6世孫(세손)이며掌令(장령)廷秀(정수)의 아들로서仁宗(인종)이죽자院相(원상)이 되어庶政(서정)을 맡았으나小尹(소윤)이 일으킨乙巳士禍(을사사화) 때鄭順朋(정순붕)의 彈劾(탄핵)을 받아舒川(서천)으로 流配途中(유배도중)果川(과천)에서賜死(사사)되었다. 權臣(권신)尹元衡(윤원형)의 勢道(세도)에阿附(아부)하여尹任(윤임) 一派(일파)를 除去(제거)시키는데成功(성공)한鄭順朋(정순붕)은 灌(관)의家族(가족)들을籍沒(적몰)해 自身(자신)의 종으로 삼았는데,甲伊(갑이)라는 灌(관)의 女종이 죽음을 무릅쓰고復讐(복수)를 하였다는 逸話(일화)가 有名(유명)하다.司導侍正(사도시정)嚴(엄)의 아들光纘(광찬)은 灌(관)에게 養子(양자)로 들어갔는데, 灌(관)이 처음 歸鄕(귀향)가게 되었을때 將次(장차)禍(화)가 酷深(혹심)하리라는 것을 알고 養子(양자)를 取消(취소)하는 文書(문서)를 만들어 주어서 奴婢(노비)가 되거나 殺戮當(살육당)하는 禍(화)를 免(면)하기도 했다.마침 그가養子(양자)로들어온 後(후)에 灌(관)의 小室(소실)이 아들을 낳았으므로 이것을 핑계 삼으면 法(법)으로는 認定(인정)되었다.그러나 灌(관)이죽음을 當(당)하고 그에光纘(광찬)이連累(연루 )되어 죽게되자 집안사람이 이 文書(문서)를 가지고 官家(관가)에가서 죽음을 免(면)해줄 것을 빌려 했으나 그는"한번 父子間(부자간)으로 이름을 붙였으니 좋으나 나쁘나 달리 生覺(생각)할 수 있느냐" 하면서 죽음에 臨(임)하여 조용히 便紙(편지)를 써서 그를 낳은 어머니와 집안 사람에게주어 作別(작별)하고 스스로輓祠(만사)를 두篇지었는데 內容(내용)이 어찌나悲切(비절)하였던지듣는 사람이 모두 슬프게 여겼다고한다.光纘(광찬)의 아내申氏(신씨)는 모든 財産(재산)과 奴婢(노비)를 沒收當(몰수당)하고 홀로 刑場(형장)에 들어가父子(부자)의 遺骨(유골)을 주워 모아다가함께 先山(선산)밑에 葬事(장사)지내고初(초)하루와 보름에는 비가 오나 눈이오나 墓(묘)에 올라갔다. 其外(그외)太宗(태종)때 大司憲(대사헌)을歷任(역임)하고文城府院君(문성부원군)에 進封(진봉)된 後(후)右議政(우의정)에 올랐던 亮(양:密直使계조의아들)과 宣祖(선조)때 同知敦寧府事(동지돈령부사)로 扈聖三等功臣(호성삼등공신)에 올라文陽君(문양군)에封(봉)해졌던希霖(희림)이 有名(유명)했고,縣監(현감)禮善(예선)의 아들銓(전)은 領議政(영의정)에 올라家門(가문)을 盤石(반석)위에 올려놓았다.中宗(중종)때務安縣監(무안현감)을 지낸沃(옥)은文武(문무) 兼備(겸비)로 이름을 떨쳤으며,顯宗(현종)때의實學者(실학자)인馨遠(형원)은 天性(천성)이 淸廉潔白(청렴결백)하여 벼슬을 버리고孤高(고고)한氣品(기품)의 野人(야인)으로 一生(일생)을 마쳤다.그밖의人物(인물)로는 正祖(정조)때北學派(북학파)에 屬(속)한 實學者(실학자)로朴齊家(박제가),李書九(이서구)等(등)과 더불어漢文新派四家(한문신파사가)>로 불리워 진得恭(득공:進士灌의 아들)>이 懷古詩(회고시)와 紀行文(기행문)에 能(능)하여李周元(이주원)으로부터東國(동국)의 文鳳(문봉)>이라는激讚(격찬)을 받았으며, 基常(기상)은憲宗(헌종)때禁衛大將(금위대장)을거쳐捕盜大將(포도대장)에 올라武名(무명)을 떨쳤다.韓末(한말)에 와서는籌備團(주비단)을 組織(조직)하여 抗日鬪爭(항일투쟁)에 앞장서다가瑞興(서흥)에서死刑(사형)當(당)한相烈(상렬)과全露韓族會(전로한족회)結成(결성)에 參與(참여)했던東說(동열)이 1935年中國(중국)南京(남경)에서金奎植(김규식),申翼熙(신익희)等(등)과함께民族革命黨(민족혁명당)을組織(조직),獨立運動(독립운동)에 獻身(헌신)하여 文化柳氏(문화유씨)를 더욱 빛냈다. 總63,885家口, 267,913名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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