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守溫(김수온,1410∼1481)은 朝鮮初期(조선초기)의 文臣(문신)으로 字(자)는 文良(문량),號(호)는 乖崖(괴애),拭疣(식우)이다.1441年(世宗23)式年文科(식년문과)에 丙科(병과)로 及第(급제), 校書館正字(교서관정자)가 되었으나 곧 世宗(세종)의 特命(특명)으로 集賢殿學士(집현전학사)가 되었다.1446年副司直(부사직)이 되고,이어서 訓鍊主簿(훈련주부)·承文院校理(승문원교리)·兵曺正郞(병조정랑)을 거쳐 1451年(文宗1)典農少尹(전농소윤), 이듬해 知榮州郡事(지영주군사)等(등)을 次例(차례)로 歷任(역임)하였다.1457年(世祖3)成均司藝(성균사예)로서 文科重試(문과중시)에 2等(2등)으로 及第(급제), 僉知中樞府事(첨지중추부사)가 되고, 이듬해 同知中樞府事(동지중추부사)에 올라 正朝副使(정조부사)로 明(명)나라에 다녀왔다. 1459年에 漢城府尹(한성부윤),이듬해 尙州牧使(상주목사),1464年 知中樞府事(지중추부사)·工曺判書(공조판서)를 歷任(역임)하고 1466年 拔英試(발영시)에 이어 登俊試(등준시)에 모두 壯元(장원),判中樞府事(판중추부사)에 오르고 쌀 20石(20석)을 下賜(하사)받았는데,文武科(문무과)壯元(장원)에게 쌀을 下賜(하사)하는 것은 이로부터 비롯되었다.이어서 戶曺判書(호조판서)를 거쳐 1468年(睿宗 卽位年)輔國崇祿大夫(보국숭록대부)에 오르고, 1471年(成宗2) 佐理功臣(좌리공신)4等(4등)에 冊祿(책녹),永山府院君(영산부원군)에 封(봉)해졌으며,1474年領中樞府事(영중추부사)를 歷任(역임)하였다.世宗(세종)때 首陽大君(수양대군)·安平大君(안평대군)이 尊敬(존경)하던 高僧(고승)信眉(신미)의 동생으로 佛經(불경)에 達通(달통)하고 諸子百家(제자백가)·六經(육경)에 該博(해박)하여 뒤에 世祖(세조)의 寵愛(총애)를 받았다.特(특)히,詩文(시문)에 뛰어나 明(명)나라 使臣(사신)으로 왔던 翰林(한림)陳鑑(진감)과 '喜睛賦(희정부)'로써 和答(화답)한 內容(내용)은 明(명)나라에까지 알려졌으며,成三問(성삼문),申叔舟(신숙주),李石亨(이석형)等(등)當代(당대)의 碩學(석학)들과 交遊(교유)하며 文明(문명)을 다투었다.治平要覽(
치평요람),醫方類聚(의방유취)等(등)의 編纂(편찬), 釋迦譜(석가보)의 增修(증수), 明皇誡鑑(명황계감), 金剛經(금강경) 等(등)의 飜譯(번역)에 參與(참여)하였으며, 圓覺寺碑銘(원각사비명)을 撰(찬)하고 四書五經(사서오경)의 口訣(구결)에 參與(참여)하였다.著書(저서)로는 '拭疣集(식우집)'이 있다. 諡號(시호)는 文平(문평)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