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萬鍾(정만종)은 1516年(中宗11) 別試文科(별시문과)에 乙科(을과)로 及第(급제)하고 正言(정언),持平(지평),掌令(장령),右副承旨(우부승지),刑曺參判(
형조참판)等(등)을 歷任(역임)하고 1539年禮曺參判(예조참판)으로 陳尉使(
진위사)가되어 明(명)나라에 다녀온 後(후)漢城府左尹(한성부좌윤)을 거쳐 忠淸道(충청도), 咸鏡道(함경도),慶尙道(경상도)等(등)의 觀察使(관찰사)를 지냈다.鄭賜湖(정사호)는 吏曺參議(이조참의), 同知中樞府使(동지중추부사)等(등)을 歷任(역임)한 後(후)黃海道觀察使(황해도관찰사),吏曺參判(이조참판),同知春秋館事(동지춘추관사),漢城府尹(한성부윤)等(등)을거쳐 刑曺判書(형조판서)에 이르렀다.
鄭士偉(정사위)는 1566年別試文科(별시문과)에 乙科(을과)로 及第(급제)하여 春秋館(춘추관)記事官(기사관)을兼(겸)하여"明宗實錄(명종실록)"의 編纂(편찬
)에 參與(참여)했다.그後(후) 都丞旨(도승지),全羅府尹(전라부윤)等(등)을 거쳐
1591年 同知事(동지사)로 明(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다음해 壬辰倭亂(임진왜란
)이 일어나자 兵曺參議(병조참의)로 王(왕)을 平壤(평양)에 扈從(호종)했고, 世子(세자)를 따라 江界(강계)로 가던 道中(도중)에 숨을 거두었다.
또한 鄭以周(정이주)는 1568年(宣祖1) 增廣文科(증광문과)에 甲科(갑과)로 及第(급제) 1570年 禮曺左郞(예조좌랑)으로 <明宗實錄(명종실록)>編纂(편찬)에 參與(참여)하고 그後(후) 正言(정언), 持平(지평),貞州牧使(정주목사)等(등)을 지냈다.그리고 韓末(한말)에 鄭春洙(정춘수)는 3.1運動(운동) 民族代表(민족대표) 33人의 한사람으로 獨立宣言文(독립선언문)에 署名(서명)하고 獄苦(옥고)를 치른 뒤 獨立運動(독립운동)과 宗敎運動(종교운동)에 從事(종사)했다.
英祖(영조)때 畵家(화가)로 이름난 鄭敾(정선)은 韓國(한국) 山水畵(산수화)의 獨自的(독자적)인 特徵(특징)을 살려 强(강)한 濃淡(농담)대조위에 靑色(청색)을 主調(주조)로 한 새로운 畵風(화풍)을 開拓(개척)하여 沈師正(심사정),趙榮錫(조영석)과 함께 三齋(삼재)로 일컬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