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盛(정성)의 아들 鄭履(정이)가 判軍器寺事(판군기시사)를 지내고 都僉議事(도첨의사)에 贈職(증직)되었으며, 鄭地(정지)는 高麗(고려)恭愍王(공민왕)때
全羅道(전라도)按撫使(안무사)를 거쳐 1377年(禑王3年)順天道兵馬使(순천도
병마사)가 되어 順天(순천), 樂安(낙안)等地(등지)에 侵入(침입)한 倭寇(왜구)를 掃蕩(소탕)하고 全羅道(전라도)巡問使(순문사)에 올랐다.그後(후) 南原(남원),南海(남해) 等地(등지)에 侵入(침입)한 倭敵(왜구)을 擊退(격퇴)한뒤 知門下府事(지문하부사)로서 海道都元帥(해도도원수), 楊廣(양광), 全羅(전라), 慶尙(경상),江陵道都指揮置使(강릉도도지휘치사)가 되고,1384年 門下評理(문하평리)에 이르렀다.
朝鮮時代(조선시대)에 鄭種(정종)은 兵曺判書(병조판서)에 올랐고 鄭敍(정서)는 縣監(현감), 鄭友直(정우직)과 鄭友賢(정우현)은 副護軍(부호군)鄭彭(정팽)은 都護府使(도호부사)를 歷任(역임)하였다. 또한 鄭鎭石(정진석)은 宣傳官(선전관)이 되었고 鄭友卨(정우설)은 戶曺判書(호조판서) 鄭敏(정민)은 牧使(목사
),鄭泰老(정태로)는 左丞旨(조승지)가 되었고 鄭在實(정재실)은 司憲府監察(사헌부감찰)가 되어 家門(가문)의 繁盛(번성)을 누렸다. 鄭忠信(정충신)은 1592年(宣祖25)武科(무과)에 及第(급제)했고,1621年(光海君13年)滿浦僉使(만포첨사)로 國境(국경)을 警備(경비)했다.1623年(仁祖1)安州牧使(안주목사)로 防禦使(방어사)를 兼任(겸임)했고,다음해 李适(이괄)의 亂(란)이 일어나자 前部大將()전부대장)으로 李适(이괄)의 軍士(군사)를 크게 무찔러 振武功臣(진무공신) 1等(등)이 되고 錦南君(금남군)에 封(봉)해졌으며 이어 平安道兵馬節度使(평안도병마절도사)에올라 寧邊大都護府使(영변대도호부사)를 兼任(겸임)했다.1627年 丁卯胡亂(정묘호란)때에 副元師(부원사)를 거쳐 그後(후)捕盜大將(포도대장),慶尙道兵馬節度使(경상도병마절도사)等(등)을 歷任(역임)했다.또한 그는 天文(천문),地理(지리),醫術(의술)等(등)에 能通(능통)했고 淸廉(청렴)하기로 名聲(명성)이 높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