姓氏의 故鄕

載寧李氏(재령이씨) (964).

아까돈보 2011. 6. 22. 11:25

 

 

載寧李氏(재령이씨)

 

▣ 由

 

 

始祖 : 李禹秤(이우칭)


始祖(시조)는 高麗(고려)의 重臣(중신) 李禹秤(이우칭)이다.
李禹秤(이우칭)은 慶州李氏(경주이시) 蘇判公(소판공)李居明(이거명)의 7世孫(7세손)으로 高麗初-中期(고려초-중기) 補祚功臣(보조공신)에 冊祿(책록)되고,
門下侍中(문하시중)을 지낸 後(후)載寧君(재령군)에 封(봉)해지자 後孫(후손)들이 載寧(재령)을 本貫(본관)으로 삼았다.原來(원래)는 慶州李氏(경주이씨

)였으나 이 때에 分貫(분관)하였다.
 

▣ 人物

 

 

高麗時代(고려시대)에 工部尙書(공부상서)李元英(이원영),令同正(영동정) 李

根仁(이근인), 上將軍(상장군) 李小鳳(이소봉)等(등)으로 代(대)를 이어왔다.
朝鮮時代(조선시대)에 李雲龍(이운용)은 武科(무과)에 올라 玉浦萬戶(옥포만호)로 壬辰倭亂(임진왜란)을맞아 慶尙水軍(경상수군)(元均)과 全羅水軍(전라

수군)(李舜臣)이 처음으로 合同作戰(합동작전)을 펴서 玉浦大捷(옥포대첩)을 거두는데 先鋒將(선봉장)이 되신後(후)壬辰倭亂後(임진왜란후)에 三道水軍統

制使(삼도수군통제사)를 歷任(역임)하고 宣武功臣(선무공신) 3等(등)에 올라 息城君(식성군)에 封(봉)해졌다. 또한 1607年(宣祖 40年) 北(북)쪽 오랑캐들이 侵入(침입)하자 咸鏡道(함경도)兵馬節度使(병마절도사)가 되어 이를 鎭壓(진압)했고,後(후)에 兵曺判書(병조판서)에 追贈(추증)되었다.또한 李塾(이숙)은 光海君(광해군)때 軍資監判官(군자감판관)을 지냈고李玄逸(이현일)은 肅宗(숙종)때 工曺參議(공조참의), 禮曺參判(예조참판), 大司憲(대사헌), 吏曺參判(이조참판) 等(등)을 歷任(역임)하고 吏曺判書(이조판서)에 올라 家門(가문)의 名聲(명성)을 높였다.李弘勛(이홍훈)은 壬辰倭亂(임진왜란)때 郭再祐(곽재우)를 도와 昌寧(창령)火旺山城(화왕산성)等地(등지)에서 敵(적)을 물리치고 큰 功(공)을 세웠다. 李瀞(이정)은 1592年壬辰倭亂(임진왜란)때 召募官(소모관)이되어 義兵(의병)을 募集(모집)하여 鎭海(진해),昌原(창원)等地(등지)에서 戰功(전공)을 세웠다. 그後(후)宜寧縣監(의령현감),尙州牧使(상주목사) 等(등)을 歷任(역임)하고 뒤에 知中樞府事(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李栽(이재)는 學者(학자)로서 1713年(肅宗39年)에"朱書講錄刊補(주서강록간보)"를 지어 刊行(간행)했고 李徽逸(이휘일)은 學行(학행)으로 薦擧(천거)되어 參奉(참봉)에 任命(임명)되었지만 赴臨(부임)하지않고 學文(학문)에만 專念(전념)하였다.
 

▣ 科擧及第者(朝鮮時代)

 

 

李孟賢(이맹현) : 文科 世祖6年(1460) 春塘臺試乙科壯元及第
李涵(이함) (1554 甲寅生) : 文科 光海君1年(1609) 增廣試 丙科
李潤龍(이윤룡) (1776 丙申生) : 文科 憲宗9年(1843) 式年試 丙科
李有臣(이유신) (1824 甲申生) : 文科 哲宗9年(1858) 式年試 丙科
李憙(이희) (1691 辛未生) : 文科 肅宗45年(1719) 增廣試 丙科
李湘(이상) (1691 辛未生) : 文科 成宗17年(1486) 式年試 丙科
李徵(이징) (1527 丁亥生) : 文科 明宗16年(1561) 式年試 丙科
李芸(이운) (1527 丁亥生) : 文科 成宗14年(1483) 春塘臺試 丙科
李世厚(이세후) (1681 辛酉生) : 文科 英祖2年(1726) 式年試 丙科
李孟賢(이맹현) (1681 辛酉生) : 文科 世祖12年(1466) 拔英試 三等
等 모두 58名의 科擧 及第者가 있다.
(文科 15名, 武科 4名, 司馬試 39名)

 

▣ 世居地

 

 

慶北(경북) 盈德郡(영덕군) 寧海邑(영해읍) 蒼水面(창수면) 仁良洞(인양2동).
盈海派(영해파)門中(문중)이 4百70餘年間(여년간) 家風(가풍)을 이어온 마을

이다.이곳에 뿌리를 내린 人物(인물)은 高麗(고려)때 節臣(절신)李午(이오)의 曾孫子(증손자)요 成宗(성종)때 副提學(부제학)을지낸 李孟賢(이맹현)의 아들 李王+愛(이애)이다. 壬辰倭亂(임진왜란)때 明(명)나라 將帥(장수)李如松(이여송)이 이마을의 山川景觀(산천경관)을 보고 반드시 큰人物(인물)이 나올 形勢(

형세)라고 感嘆(감탄)하고 이를 猜忌(시기)하여 寧海府(영해부) 시리목,쟁이골 等(등)의 山脈(산맥)을 끊어버렸다는 傳說(전설)이 있다.그러나 李王+愛(이애)의 孫子(손자)贈(증)李祖參判(이조참판)李涵(이함)이 人夫(인부)를 動員(동원),山脈(산맥)을 다시 이었고 그後(후) 李氏門中(이씨문중)은 當代(당대)千石(천석)의 富(부)를 쌓기 始作(시작)했고 여러 碩學(석학)들이 輩出(배출)되었다고 한다.
 

▣ 本貫 沿革

 

 

本貫所在地 : 黃海道 載寧


載寧(재령)은 黃海道(황해도)中央部(중앙부)에 位置(위치)하는地名(지명)으로 高句麗(고구려)때에는 息城(식성)(息城:漢城,乃忽,漢忽)이라 불리었다 757年(新羅 景德王16)重盤郡(중반군)으로 改稱(개칭)하였다가,907年(孝恭王 11)에 安州(안주)로 고쳤다.995年(高麗 成宗14)에 防禦使(방어사)를 두었다가 1018年(顯宗 9)에 防禦使(방어사)를 廢(폐)하고 安西都護府(안서도호부)에 隸屬(예속)시켰으며, 睿宗(예종)때는 監務(감무)를 두었고, 1217年(高宗 4) 契丹兵(거란병)의 侵攻(침공)을 막은 功(공)으로 載寧(재령)으로 고치고 縣(현)으로 昇格(승격)하였다. 1397年(太祖6) 豊州(풍주)管下(관하)의 三支縣(삼지현)을 合(합

)하였고,1415年(太宗15)1千戶 以上의 고을을 郡(군)으로 할 때 郡守官(군수관)으로 昇格(승격)하였다.
 

▣ 人口數

 

 

統計廳(통계청)의 人口調査(인구조사)에 依(의)하면 載寧李氏(재령이씨)는
1985年에는 摠 11,060家口 45,417名,
2000年에는 摠 16,112家口 50,940名이 있는 것으로 調査(조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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