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麗時代(고려시대)에 工部尙書(공부상서)李元英(이원영),令同正(영동정) 李
根仁(이근인), 上將軍(상장군) 李小鳳(이소봉)等(등)으로 代(대)를 이어왔다. 朝鮮時代(조선시대)에 李雲龍(이운용)은 武科(무과)에 올라 玉浦萬戶(옥포만호)로 壬辰倭亂(임진왜란)을맞아 慶尙水軍(경상수군)(元均)과 全羅水軍(전라
수군)(李舜臣)이 처음으로 合同作戰(합동작전)을 펴서 玉浦大捷(옥포대첩)을 거두는데 先鋒將(선봉장)이 되신後(후)壬辰倭亂後(임진왜란후)에 三道水軍統
制使(삼도수군통제사)를 歷任(역임)하고 宣武功臣(선무공신) 3等(등)에 올라 息城君(식성군)에 封(봉)해졌다. 또한 1607年(宣祖 40年) 北(북)쪽 오랑캐들이 侵入(침입)하자 咸鏡道(함경도)兵馬節度使(병마절도사)가 되어 이를 鎭壓(진압)했고,後(후)에 兵曺判書(병조판서)에 追贈(추증)되었다.또한 李塾(이숙)은 光海君(광해군)때 軍資監判官(군자감판관)을 지냈고李玄逸(이현일)은 肅宗(숙종)때 工曺參議(공조참의), 禮曺參判(예조참판), 大司憲(대사헌), 吏曺參判(이조참판) 等(등)을 歷任(역임)하고 吏曺判書(이조판서)에 올라 家門(가문)의 名聲(명성)을 높였다.李弘勛(이홍훈)은 壬辰倭亂(임진왜란)때 郭再祐(곽재우)를 도와 昌寧(창령)火旺山城(화왕산성)等地(등지)에서 敵(적)을 물리치고 큰 功(공)을 세웠다. 李瀞(이정)은 1592年壬辰倭亂(임진왜란)때 召募官(소모관)이되어 義兵(의병)을 募集(모집)하여 鎭海(진해),昌原(창원)等地(등지)에서 戰功(전공)을 세웠다. 그後(후)宜寧縣監(의령현감),尙州牧使(상주목사) 等(등)을 歷任(역임)하고 뒤에 知中樞府事(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李栽(이재)는 學者(학자)로서 1713年(肅宗39年)에"朱書講錄刊補(주서강록간보)"를 지어 刊行(간행)했고 李徽逸(이휘일)은 學行(학행)으로 薦擧(천거)되어 參奉(참봉)에 任命(임명)되었지만 赴臨(부임)하지않고 學文(학문)에만 專念(전념)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