姓氏의 故鄕

東萊鄭氏(동래정씨) (979).

아까돈보 2011. 6. 30. 07:54

 

 

東萊鄭氏(동래정씨)

 

▣ 由來

 

始祖(시조) : 鄭繪文(정회문)


東萊鄭氏(동래정씨)는 新羅(신라)의 6部村長(6부촌장) 가운데 觜山珍部(자산진부) 村長(촌장) 智白虎(지백호)의 後孫(후손)이다. 始祖(시조)는 新羅(신라)때 安逸戶長(안일호장)을지낸 鄭繪文(정회문)으로 傳(전)해지고있으나 文獻記錄(문헌기록)이 없는데다 그의 後孫(후손)으로 高麗(고려)때 甫尹戶長(보윤호장)을 지낸

鄭之遠(정지원) 亦是(역시)  그 以後(이후)의 血緣系譜(혈연계보)가 不確實(불확실)해 鄭之遠(정지원)을 1世(세)로 하고 그後(후) 安逸戶長(안일호장)을 지낸 鄭文道(정문도)를 中始祖(중시조)로 한다.現在(현재)의 釜山(부산) 東萊(동래)를 世居地(세거지)로 삼은 까닭에 東萊(동래)를 本貫(본관)으로 쓰게 됐다.
 

▣ 人物

 

 

朝鮮時代(조선시대)에 相臣(상신) 17名(명), 大提學(대제학) 2名(명),湖堂(호당) 6名(명),功臣(공신) 4名(명), 判書(판서) 20餘名(여명)과 文科(문과) 及第(급제) 1百98名(명)을 輩出(배출)한 名門(명문)이다.그中(중)에서도 14世孫(세손)鄭蘭宗(정난종)에 이르러 東萊鄭氏(동래정씨)는 名門(명문)의 盤石(반석)을 더욱 굳혔다.性理學者(성리학자)인 그는 判書(판서)를거쳐 右參贊(우참찬)에 이르고 世祖實錄(세조실록)과 睿宗實錄(예종실록)編纂(편찬)에 參與(참여)하기도 했다.成宗(성종)14年(년) 明(명)나라에 다녀오는 等(등) 外交家(외교가)로도 手脘(수완)을 보였으며 書藝(서예)에도 뛰어나 圓覺寺碑(원각사비) 글씨는 바로 그의 솜씨다.그의 네아들 中(중)鄭光弼(정광필)은 中宗(중종)때 領議政(영의정)에 오르고 當時(당시)에 어진 政丞(정승)으로 推仰(추앙)된 人物(인물)이다.

그의 孫子(손자)鄭惟吉(정유길)은 大提學(대제학),左議政(좌의정)을 지냈으며 鄭惟吉(정유길)의子孫(자손)에서 많은 人物(인물)이 나왔다.日帝侵略(일제침략)의 亂世(란세)속에서 5千年間(천년간) 이어온 朝鮮(조선)의 얼을 通(통)해 民族魂(민족혼)을 일깨운 爲堂(위당)鄭寅普(정인보).그는 今世紀(금세기)東萊鄭氏家門(동래정씨가문)에 또 하나의 山脈(산맥)을 이룬다.

儒學者(유학자)이자 史學者(사학자)인 그는 解放(해방)以前(이전)에는 延禧專門(연희전문)(延世大),梨花女大(이화여대)等(등)에서 國文學(국문학)을 講議(강의)했고.時代日報(시대일보),朝鮮日報(조선일보) 論說委員(논설위원)으로 國學拔掘(국학발굴)에 힘썼다.그는 1892年 서울토박이로 태어나한때는 獨立運動(독립운동)을 爲(위)해 中國(중국)을 往來(왕래)하며 上海(상해)에서 抗日獨立團體(항일독립단체)인 同濟社(동제사)를 組織(조직)獨立運動(독립운동)에 앞장섰다.解放後(해방후)初代監察委員長(초대감찰위원장)을 지내며 著述活動(저술활동)에도 힘을써<朝鮮史硏究(조선사연구)>, <陽明學年表(양명학연표)>等(등)의 著述(저술)을 남겼다.
 

▣ 科擧及第者(朝鮮時代)

 

  鄭光世(정광세) : 文科 成宗10年(1479) 別試甲科壯元及第
鄭士龍(정사룡) : 文科中宗11年(1516) 重試 一等 壯元及第
鄭大秊(정대년) (1503 癸亥生) : 文科 中宗27年(1532) 別試 甲科 壯元及第
鄭惟吉(정유길) (1515 乙亥生) : 文科 中宗33年(1538) 別試 甲科 壯元及第
鄭知和(정지화) (1613 癸丑生) : 文科 仁祖15年(1637) 別試 甲科 壯元及第鄭東後(정동후) (1659 己亥生) : 文科肅宗31年(1705) 式年試 甲科) 壯元及第鄭亨益(정형익) (1664 甲辰生) : 文科 肅宗45年(1719) 增廣試甲科壯元及第
鄭彦燮(정언섭) (1686 丙寅生) : 文科 英祖1年(1725) 增廣試 甲科 壯元及第
鄭浣(정완) (1752 壬申生) : 文科 純祖7年(1807) 庭試 甲科 壯元及第
鄭基一(정기일) (1787 丁未生) : 文科 純祖26年(1826) 別試 甲科 壯元及第
等 모두 723名의 科擧及第者가 있다.
(文科 196名, 武科 30名, 司馬試 483名, 譯科 4名, 醫科 1名, 陰陽科 3名, 律科 6名)


▣ 世居地

 

 

慶北醴泉郡 豊陽面 憂忘里.


소가 누워 휘영청 밝은 달을 바라보고 있는 形勢(형세)라 해서 臥牛望月山(와우망월산).이 山(산)의 이름을 따 牛望(우망)골이라 했던 것을 高宗(고종)때에 音(음)이 같은 글자를 따 근심을 잊고 사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憂忘(우망골)로 고쳐 只今(지금)에 이르고 있다.
마을 全體(전체)170餘家口(여가구)中(중)160家口(가구)가 모두 東萊鄭氏(동래정씨)로 27世孫(세손)부터 34世孫(세손)까지 8代(대) 한 핏줄이 모여산다.
처음에는 慶北(경북)安東市(안동시)九潭里(구담리)에 살다 成宗(성종)때 吏曺判書(이조판서)를 지낸 12世孫(세손) 鄭龜齡(정균령)이 子孫(자손)이 繁昌(번창)할 곳이 못된다 하여 約(약) 2百40年(년)前(전)에 이곳으로 옮겨왔다. 또한 이 마을은 왜가리 保護區域(보호구역)으로 指定(지정)되어 있다.

 

▣ 本貫沿革

 

 

本貫所在地 : 釜山廣域市


東萊(동래)는 現在(현재)釜山(부산)과 梁山(양산)의 一部(일부)地域(지역)을 차지했던 옛 行政區域(행정구역)으로 慶尙南道(경상남도)南東端(남동단)에 位置위치)하고 있다.三國時代(삼국시대)以前(이전)부터 小國(소국)을 이루어 萇山國(장산국) 또는 萊山國(내산국)이었다 한다.79年(新羅 脫解王23)에 이 地域(지역)을 占領(점령)하여 居漆山郡(거칠산군)을 설치하고,757年(景德王16)에 東萊郡(동래군)으로 고쳐 東平(동평)과 機張(기장)은 東萊(동래)의 領縣(영현)으로 삼았고,東萊(동래)는 良州(양주:梁山)의 管轄(관할)로 改編(개편)하였다. 1018年(高麗 縣宗9)에는 蔚州(울주:蔚山)의 屬縣(속현)이 되었다.1397年(太祖6)에 東萊鎭(동래진)으로 兵馬使(병마사)가 判縣事(판현사)를 兼(겸)했고1423年(世宗 5)에 釜山浦(부산포)를 開港(개항)하여 倭館(왜관)을 設置(설치)했으며 僉節制使(첨절제사)를 두었다가 後(후)에 縣(현)으로 바꾸었다.1510年(中宗5)에 三浦倭亂(삼포왜란)으로 倭館(왜관)을 廢鎖(폐쇄)하였다가 1547年(明宗 2)에 다시 倭館(왜관)을 設置(설치)하면서 東萊(동래)를 都護府(도호부)로 昇格(승격)시켰다. 1592年(宣祖 25)以後(이후)縣(현)으로 降等(강등)되었다가 復舊(복구)되기도 했으며, 1749年(英祖 25)에 東萊府(동래부)에 獨鎭(독진)이 設置(설치)되어 軍事的(군사적)으로 한층 强化(강화)되었다.1876年(高宗13)에 最初(최초)의 開港場(개항장)이 釜山浦(부산포)에 設置(설치)되었고,1890年에는 東萊監理署(동래감리서)되었다가 1903年(년)郡(군)으로 降等(강등)되었다가 1906年 다시 府(부)로 昇格(승격)되었다.1950年 부터 3年間(3년간) 臨時(임시)首都(수도)이기도 하였다가 1963年(년) 直轄市(직할시)로 昇格(승격)하였다. 1973年에는 東萊郡(동래군)이 梁山郡(양산군)으로 廢合(폐합)되었으며,1994年釜山廣域市(부산광역시)로 改編(개편)되었다.
 

▣ 人口數

 

 

統計廳(통계청)의 人口調査(인구조사)에 依(의)하면 東萊鄭氏(동래정씨)는
1985年에는 摠 98,423家口 414,785名,

2000年에는 摠 137,524家口 442,363名이 있는 것으로 調査(조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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