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時代(조선시대)에 相臣(상신) 17名(명), 大提學(대제학) 2名(명),湖堂(호당) 6名(명),功臣(공신) 4名(명), 判書(판서) 20餘名(여명)과 文科(문과) 及第(급제) 1百98名(명)을 輩出(배출)한 名門(명문)이다.그中(중)에서도 14世孫(세손)鄭蘭宗(정난종)에 이르러 東萊鄭氏(동래정씨)는 名門(명문)의 盤石(반석)을 더욱 굳혔다.性理學者(성리학자)인 그는 判書(판서)를거쳐 右參贊(우참찬)에 이르고 世祖實錄(세조실록)과 睿宗實錄(예종실록)編纂(편찬)에 參與(참여)하기도 했다.成宗(성종)14年(년) 明(명)나라에 다녀오는 等(등) 外交家(외교가)로도 手脘(수완)을 보였으며 書藝(서예)에도 뛰어나 圓覺寺碑(원각사비) 글씨는 바로 그의 솜씨다.그의 네아들 中(중)鄭光弼(정광필)은 中宗(중종)때 領議政(영의정)에 오르고 當時(당시)에 어진 政丞(정승)으로 推仰(추앙)된 人物(인물)이다.
그의 孫子(손자)鄭惟吉(정유길)은 大提學(대제학),左議政(좌의정)을 지냈으며 鄭惟吉(정유길)의子孫(자손)에서 많은 人物(인물)이 나왔다.日帝侵略(일제침략)의 亂世(란세)속에서 5千年間(천년간) 이어온 朝鮮(조선)의 얼을 通(통)해 民族魂(민족혼)을 일깨운 爲堂(위당)鄭寅普(정인보).그는 今世紀(금세기)東萊鄭氏家門(동래정씨가문)에 또 하나의 山脈(산맥)을 이룬다.
儒學者(유학자)이자 史學者(사학자)인 그는 解放(해방)以前(이전)에는 延禧專門(연희전문)(延世大),梨花女大(이화여대)等(등)에서 國文學(국문학)을 講議(강의)했고.時代日報(시대일보),朝鮮日報(조선일보) 論說委員(논설위원)으로 國學拔掘(국학발굴)에 힘썼다.그는 1892年 서울토박이로 태어나한때는 獨立運動(독립운동)을 爲(위)해 中國(중국)을 往來(왕래)하며 上海(상해)에서 抗日獨立團體(항일독립단체)인 同濟社(동제사)를 組織(조직)獨立運動(독립운동)에 앞장섰다.解放後(해방후)初代監察委員長(초대감찰위원장)을 지내며 著述活動(저술활동)에도 힘을써<朝鮮史硏究(조선사연구)>, <陽明學年表(양명학연표)>等(등)의 著述(저술)을 남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