姓氏의 故鄕

晉陽化氏(진양화씨) (1013).

아까돈보 2011. 7. 17. 23:44

 

 

晋陽化氏(진양화씨)

▣ 由來

 

 

始祖(시조) : 化明臣(화명신).

 


始祖(시조)는 化明臣(화명신)은 中國(중국)明(명)나라 사람으로 朝鮮中葉(조선중엽)丁酉再亂(정유재란) 때 歸化(귀화)했다.瑯琊(낭야) 사람인 그는 明(명)나라 中葉(중엽) 吏部尙書(이부상서)를 지낸 本來(본래)의姓(성)은 花氏(화씨)이며 本來(본래)의 이름은 花光新(화광신) 였다고 한다. 滿州(만주)의 女眞族(여진족)이 强盛(강성)해지면서 北京(북경)을 占領(점령)한 淸軍(청군)이 瑯琊(낭야)에까지 밀려들자 化明臣(화명신)은 "어진 사람은 機會(기회)를알고 行(행)한다"
며'禮義(예의)의 나라'朝鮮(조선)으로 一家(일가)를 이끌고亡命(망명)했다.멀리 廣州(광주)郊外(교외)의 沼靈臺(소령대)에 터를 잡고 定着(정착),이름도 姓(성)도 숨기고 살았다.朝鮮(조선)成宗(성종)때 그의 이름이 朝廷(조정)에 알려졌다.成宗(성종)은"中國(중국)의 花氏(화씨)가 朝鮮國(조선국)에 歸化(귀화)한것은 向化(향화)의 義理(의리)"라며"化(화)"字(자)를 姓(성)으로 내렸다. 花氏(화씨)가 化氏(화씨)가 된 緣由(연유)다. 慶城君(경성군)이라  封(봉)해진 그는 都承旨(도승지)에 起用(기용)됐다. 그러나 化氏(화씨)는 得姓(득성)始祖(시조) 以後(이후) 賜姓譜牒(사성보첩)을 잃었다.憲宗(숙종)때 後孫(후손)들이 安東府(안동부)에 保存(보존)돼있는 族譜(족보)를 가까스로 찾아냈으나 原本(원본)이 크게 毁損(훼손)돼 正確(정확)한 先系(선계)를 밝히지는 못하고 化明臣(화명신)의 6代孫(6대손)으로 알려진 化燮(화섭)을 1世(1세)로 하여 世系(세계)를 이어간다.

▣ 本貫沿革

 

 

本貫所在地 : 慶尙南道 晉州

 

晉州(진주)은 慶尙南道(경상남도)南西(남서)쪽에 位置(위치)한 地名(지명)으로 本來(본래)三韓時代(삼국시대)에 小國(소국)인 古淳是國(고순시국)이 있었던 곳이다.百濟(백제)의 居烈城(거열성)이었고,新羅(신라)文武王(문무왕)때 新羅(신라)의 領土(영토)가 되어居烈州(거열주)라불리었으며,757年(新羅景德王16)九州五小京制(구주오소경제)의 實施(실시)와함께 康州都督府(강주도독부)로 고쳤다가,惠恭王(혜공왕)때 菁州(청주)로 改稱(개칭)되었다.高麗初(고려초)에 康州(강주)로 還元(환원)되었다.983年(成宗2)全國(전국)에 12牧(12목)을 둘때 晉州牧(진주목)이 되었다. 995年(成宗14)에는 定海軍(정해군)이라하고 節度使(절도사)를 두어山南道(산남도)에 屬(속)하게 하였다.1012年에 按撫使(안무사)로 고쳤다가, 1018年(顯宗9)에 晉州牧(진주목)으로復舊(복구)되었다. 1310年(忠宣王2)에 晉州(진주)로 降等(강등)되었다가 1356年(恭愍王5)에 다시 晉州牧(진주목)으로 回復(회복)되었다.1392年(太祖1)에 晉陽大都護府(진양대도호부)가 되었다가 1402年(太宗2)에 晉州牧(진주목)으로 還元(환원)되어 朝鮮時代(조선시대)同安(동안)維持(유지)되었다.1895年(高宗32)地方制度(지맙제도)改正(개정)으로 晉州府(진주부)晉州郡(진주군)이 되었다가,1896年에 13道制實施(13도제실시)로 慶尙南道(경상남도)晉州郡(진주군)이 되었다.1931年에 晉州面(진주면)이 晉州邑(진주읍)으로 昇格(승격)하였다. 1939年 晉州邑(진주읍)이 晉州市(진주시)로 昇格(승격)하면서 나머지 地域(지역)이 晉陽郡(진양군)으로 改稱(개칭)되었으며, 1995年晉陽郡(진주군)이 晉州市(진주시)에 統合(통합)되었다.

▣ 人口數

 

 

統計廳(통계청)의 人口調査(인구조사)에 依(의)하면 晉陽化氏(진주화씨)는
1985年에는 總 400家口 1,592名,
2000年에는 總 252家口 824名이 있는 것으로 調査(조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