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時代(조선시대)7名(7명)의 文科及第者(문과급제자)를 비롯,많은 官職者(관직자)를 輩出(배출)한 靑海李氏(청해이씨)는 그 代表的(대표적)인 人物(인물)로 李之蘭(이지란)의 아들 李和英(이화영)과 兵曺判書(병조판서)李裕民(이유민)等(등)을 들 수 있다. 李和(이화영)은 1392年 朝鮮開國(조선개국)에 功(공)을 세워 開國原從功臣(개국원종공신)이 되었으며 1398年 保功大將軍(보공대장군)을거쳐 上護軍(상호군)이 되었다.1400年 太宗(태종)이 卽位(즉위)하자 禮曺典書(예조전서)에 昇進(승진)하고 그後(후)都總提(도총제),知議政府事(지의정부사),議政府參贊(의정부참찬)等(등)을 거쳐 判右軍府事(판우군부사)에 이르렀다. 李裕(이유민)은 1696年 戊年文科(무년문과)에 丙科(병과)로 及第(급제)하고 承文院(승문원)에 登用(등용)된 後(후)扶安縣監(부안현감),洪州牧使(홍주목사
),忠州(충주)와 義州(의주)의 牧使(목사),水原府使(수원부사),咸鏡北道兵馬節度使(함경북도병마절도사)等(등)을 지내고 1721年 刑曺參判(형조참판)이 되었으며 英祖(영조)1年 兵曺判書(병조판서)로 特進(특진)되었다.
訓鍊大將(훈련대장)에 오른 李重老(이중로)는 16歲(16세)로 武科(무과)에 及第(급제)하고 宣傳官(선전관)을 거쳐 1621年 伊川府使(이천부사)가 되었다. 仁祖反正(인조반정)에 參與(참여)하여 靑社功臣(청사공신)2等(2등)이 되고 靑興君(청흥군)에 封(봉)해지고 都總府副總官(도총부부총관)에 올라 訓鍊都正(
훈련도정)을 兼任(겸임)했다.그後(후)捕盜大將(포도대장)으로 있다가 李适(이괄)의 亂(란)이 일어나자 京畿(경기),江原(강원)兩道左防禦使(양도좌방어사)가 되어 禮成江(예성강)을 防禦(방어)하다가 戰死(전사),兵曺判書(병조판서)에 追贈(추증)되었다. 그의 아버지 李麟奇(이인기)는 報恩(보은)과 盈德(영덕)의 縣監(현감)을 지낸 뒤 光海君(광해군)의 失政(실정)을 보고 隱居(은거),1623年 仁祖反正(인조반정)으로 加平郡守(가평군수)가 되고 李适(이괄)의 亂(란)에 아들 李重老(이중로)가 戰死(전사)하자 軍器寺正(군기시정),同知中樞府事(동지중추부사)等(등)
에 特進(특진)되었으며 1630年 嘉善大夫(가선대부)가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