權 慄(권 율):(1537~1599)-(壬辰倭亂時幸州大捷의 名將)
♥歷史와 人物♥
【姓 名】 權 慄(권 율) 【生歿年】中宗(중종)32年(1537)∼宣祖(선조)32年(1599) 【本 貫】 安東(안동) 權(권) 【字·號】彦愼언신), 晩翠堂(만취당), 暮嶽(모악) 【諡 號】忠莊(충장) 【時 代】 朝鮮中期 【性 格】 文臣, 名將
中宗(중종)32年(1537)∼宣祖(선조)32年(1599).本貫(본관)은 安東(안동),字(자
)는 彦愼(언신),號(호)는 晩翠堂(만취당)或(혹)은 暮嶽(모악)이다.아버지는 領議政(영의정)權轍(권철)이고 李恒福(이항복)의 丈人(장인)이다.서울 鍾路區(종로구)弼雲洞(필운동)12番地(번지)가 그가 살던 집터이며,이 집을 사위 李恒福(이항복)에게 물려준 뒤에는 杏村洞(행촌동)1番地(번지)로 移舍(이사)하여 居住(거주)하였다 朝鮮中期(조선중기)의 文臣(문신)이며 名將(명장)으로서 宣祖(선조)15年(1582)에
式年文科(식년문과)에 丙科(병과)로 及第(급제)하여 承文院正字(승문원정자)가 되었고,뒤이어 成均館典籍(성균관전적) · 司憲府監察(사헌부감찰) · 禮曹佐郞(예조좌랑) · 戶曹正郞(호조정랑) · 全羅道都事(전라도도사) · 鏡城判官(경성판관)을 거쳐 宣祖(선조)24年(1591)에 義州牧使(의주목사)가 되었다. 이듬해 壬辰倭亂(임진왜란)이 일어나자 光州牧使(광주목사)가 되었는데, 倭軍(왜군)이 서울을 陷落(함락)하자 全羅道巡察使(전라도순찰사)李洸(이광)과 防禦使(방어사)郭嶸(곽영)이 4萬餘名(만여명)의 軍士(군사)를 募集(모집)할 때 光州牧使(광주목사)로서 郭嶸(곽영)의 揮下(휘하)에서 中衛將(중위장)이 되어 서울 收復(수복)을 爲(위)하여 北進(북진)하다가 龍仁(용인)에 이르러 倭軍(왜군)에 敗北(패배)를 當(당)하고 光州(광주)로 되돌아갔다.南原(남원)에서 義兵(의병)1千餘名(천여명)을 募集(모집)하여 다시 北進(북진)하다가 錦山(금산)에서 全州(전주)로 들어오려는 倭將(왜장)小早川隆景(소조천륭경)의 軍隊(군대)를 맞아 同福縣監(동복현감)黃進(황진)과 함께 梨峙(이치)에서 싸워 그를 擊退(격퇴)시켜 湖南(호남)을 保存(보존)하였으며 그 功(공)으로 그해 全羅道觀察使(전라도관찰사) 兼(겸)巡察使(순찰사)가 되었다. 그는 다시 軍士(군사) 1萬餘名(만여명)을 거느리고 北進(북진)하여 水原(수원)의 禿城(독성)에 堅固(견고)한 陣地(진지)를 構築(구축)하고 持久戰(지구전)과 遊擊戰(유격전)을 展開(전개)하였다.이에 서울을 占領(점령)하고 있던 倭將(왜장) 總帥(총수
)宇喜多秀家(우희다수가)가 背後(배후)의 威脅(위협)을 느껴 軍隊(군대)를 보내어
攻擊(공격)하여 오는 것을 擊退(격퇴)하였다. 이듬해 溟(명)의 援軍(원군)과 協力(협력)하여 서울 收復作戰(수복작전)을 積極的(적극적)으로 펴기 爲(위)하여 새로운 根據地(근거지)를 物色(물새)하다가 幸州山城(행주산성)을 擇(택)하게 되었다.그리하여 그 城(성)을 修理(수리)하고 重柵(중책)을 設置(설치)하여 兵力(병력)을 나누어 全羅兵使(전라병사) 宣居怡(선거이)로
하여금 衿川[금천 : 只今의 시흥(始興)陽川江岸(양천강안)]에 陣(진)을 쳐 倭軍(
왜군)을 牽制(견제)케 하는 한便(편), 나머지 軍士(군사) 2千餘名(2천여명)을 이끌고 漢江(한강)을 건너 幸州山城(행주산성)에 들어가 陣(진)을 쳤다.이 때 休靜(휴정)의 弟子(제자)處英(처영)도 義僧兵(의승병)을 거느리고 參戰(참전)하였는데, 幸州山城(행주산성)의 總兵力(총병력)은 1萬名(1만명)을 넘지 못하였다.마침내 倭將(왜장) 총수 宇喜多秀家(우희다수가)를 비롯하여 倭軍(왜군) 3萬名(3만명)이 攻擊(공격)하여 오자 合心協力(합심협력),死力(사력)을 다하는 奮戰(분전)으로 敵(
적)에게 莫大(막대)한 損害(손해)를 입혀 擊退(격퇴)하였다.이것이 宣祖(선조)26年(1593)2月 12日에 있었던 幸州大捷(행주대첩)이다. 그뒤 倭軍(왜군)의 再侵(재침)을 警戒(경계)하여 坡州山城(파주산성)으로 옮겨가서 都元帥(도원수) 金命元(
김명원) · 副元帥(부원수)李斌(이빈)等(등)과 함께 城(성)을 지키면서 戰勢(전세)를 觀望(관망)하였다.그 동안 明(명)과 日本(일본) 사이에 講和會談(강화회담)이 進行(진행)되어 一部地域(일부지역)을 除外(제외)하고 休戰態態(휴전상태)에 들게 되자,그는 軍士(군사)를 이끌고 全羅道(전라도)로 復歸(복귀)하였다.그해 6月에 幸州大捷(행주대첩)의 功(공)으로 金命元(김명원)을 代身(대신)하여 都元帥(도원수)가 되어 嶺南(영남)에 駐屯(주둔)하게 되었는데,宣祖(선조)28年(1595)에 逃亡兵(도망병)을 卽決(즉결)한 罪(죄)로 解職(해직)되었다가 곧 漢城府判尹(한성부판윤)에 起用(기용)되었으며,戶曹判書(호조판서) · 忠淸道觀察使(충청도관찰사)를
거쳐 이듬해 다시 都元帥(도원수)가 되었다. 宣祖(선조)30年(1597)丁酉再亂(정유재란)이 일어나자 倭軍(왜군)의 北上(북상)을
막기 爲(위)하여 明(명)의 提督(제독)麻貴(마귀)와 함께 蔚山(울산)에서 對陣(대진
)하다가 明(명)의 經略朝鮮軍務(경략조선군무)楊鎬(양호)의 退却令(퇴각령)으로 撤收(철수)하였다.이어 順天(순천)曳橋(예교)의 倭軍(왜군)을 攻擊(공격)하려 하였으나,戰爭(전쟁)의 擴大(확대)를 꺼려하는 明將(명장)들의 非協助(비협조)로 失敗(실패)하였다.宣祖(선조)32年(1599)에 老患(노환)으로 官職(관직)을 辭任(사임
)하고 故鄕(고향)으로 돌아갔다.죽은 뒤 領議政(영의정)에 追贈(추증)되었고,宣祖(선조)37年(1604)에 宣武功臣(선무공신)1等(1등)에 永嘉府院君(영가부원군)에 追封(추봉)되었다.幸州(행주)의 紀功祠(기공사)에 祭享(제향)되었으며,諡號(시호)는 忠莊(충장)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