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있는 내동기들

안동, 병호시비의 현장 호계서원(虎溪書院) - 오토산.

아까돈보 2015. 8. 17. 14:43

 

사진이 잘보이지 않으시면 아래주소로 확인해주세요

http://blog.daum.net/uh512/8460

 

병호시비의 현장  호계서원(虎溪書院)

 

 

1570년 퇴계선생이 돌아가시자 그의 제자들이 각 고을에서 서원을 짓고

선생의 뜻을 어어받아 향촌의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김부륜.조목.금응협.금난수.금응훈.이덕홍.김택룡등 예안출신은 비교적 연배가

높은편으로 이른시기 퇴계문하에서 관직보다 향촌활동을 많이 했던 인물이었고

류운룡.류성룡.김성일.우성전.정탁등은 안동을 거주지로 퇴계가 학자로 명성을

얻은후에 사제 관계를 맺어 상대적으로 후배였고 관료활동을 했던 인물이 많다.

선성현(예안)의 유림은 도산서당을 중심으로 도산서원을 짖게 되었고 안동의

유림은 낙동강 상류 여신촌 오로봉(월곡면 도곡리) 여강서원(廬江書院)을 세웠다.

 

여강서원은 1573년 착공 3년만에 97칸으로 안동에서 가장 큰규모 서원을 준공

1576년(선조9) 2월 도산서원과 같은날 퇴계선생의 위판을 사당에 봉안했으며

1605년 갑술년 홍수로 건물일부가 유실되어 이듬해 위쪽으로 이건하였고

1920년 서애.학봉 두분을 추배하였고 1676년 호게서원으로 사액되었다.

 

애학쪽은 서애는 영의정을 지냈고 학봉은 관찰사를 역임하였으니 관직 높낮이로

결정하자고 주장하고 학애를 주장하는쪽에서는 우리나라 풍속에 나이 우선이니

네살위인 학봉이 왼쪽에 위치해야 한다고 주장해 조정에서 당시 영남을 대표하는

상주의 우복 정경세에게 자문을 구해 서애를 왼쪽, 학봉을 오른쪽에 배향하였다.

 

20년후 1805년(순조5) 영남 4현 서애 류성룡.학봉 김성일.한강 정구.여헌 정현광등

네분을 문묘에 종사를 청원하는 일을 추진하고 여기에 서애.학봉으로 할지?

학봉.서애로 할지? 순서가 문제가 되어 문묘 종사운동이 성사되지 않았고

1912년(순조12) 호파 일각에서 대산 이상정을 추가로 배향하는 논의가 있었으나

이를 두고 병파에서 적극 반대하여 서애의 위패를 병산서원으로 옮기고

대원군이 1866년(고종3) 당시 판중추부사 낙파 류후조와 안동부사 심동신에게

병호시비 수습을 맡겼고 1868년 대원군 서원철페 당시 존치되었으나 1870년

(고종7) 호계서원에서 호파 유림 600여명과 병파 유림 400명이 모여 논의 실패

 

1871년(고종8) 병.호 양문중간의 시비가 종식되지 아니하여 다시 훼철령이

내려져 위패를 땅에 묻고 사당을 허물고 강당만 남아 있었으며  논란을 이어오다

일제강점기에 호계서원 재산을 몰수해 지방비에 충당하기도 하였고 잔여 재산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협동학교 설립 재원으로 사용하였으며 1973년안동댐 건설로

인하여 강당과 주사를 현위치인 임하리 반변천변으로 이건하였으나 다시 임하댐

건설로 하류에 보조댐이 건설되어 건물이 호수의 안개속에 묻혀 있던중 서원 바로

 상류댐 여수로 방류구가 설치되어 400년이 지난 최근 호계서원 사당복원사업을

계기로 2009년 경상북도의 중재로 서애 왼쪽 학봉 오른쪽으로 안동댐민속촌으로

이건하는것으로 합의 하였으나  부지가 좁아서 안된다는 여론과 양문중의

유물관건립비 100억씩 확보로 인한 시민여론이 일어나 앞으로 귀추가 주목된다.

 

 호계서원의 숭교당이 9칸 양측의 협실을 포함하면 15칸의 큰 규모이었음을 보고

호계서원 탐방을 끝으로 오늘의 답사를 마쳤으며 오늘도 보람있는 하루를 보내며

거경대학 이동수 박사님과 권석환국장님과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를 드린다.

 

세상사 한마디

그 숱한 내 행동이 남을 즐겁게 하지 못했을지라도 남을 괴롭게 하지는 않았던가?

그 숱한 내말이 남을 기쁘게 하지는 못했을지라도 남을 화내게 하지는 않았던가?

그 숱한 내생각이 남을  이롭게하지는 못했을지라도 남을 해치려하지는 않았던가?

사랍답게 살려면 한번쯤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임하댐 본댐이 바로 보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