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승소는 高麗 禑王 때 文科에 及第하고,元나라에 가서 著作郞(저작랑)을 지내다가 歸國하여 扶餘監務(부여감무)를 지냈다. 朝鮮 中宗 때의 人物인 趙淵(조연)은 1510年 進士試(진사시)에 合格하고 陰補로 登用되어 1529年 宣陵參奉(선릉삼봉)을 거쳐 뒤에 義禁府都事(의금부도사),
幽谷道察訪(유곡도찰방) 等을 歷任하였으며,生六臣(생육신)의 한 사람인 趙旅(조여),趙任道(조임도)는 仁祖反正 後에 工曺佐郞(공조좌랑),趙平(조평)은察訪(찰방), 趙逢源(조봉원)은 同知中樞府使(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또 趙榮祐(조영우)는 1713年 進士試(진사시)에 合格하여 僉知中樞(첨지중추)를 지냈고, 趙根(조근)은 1666年 別試文科(별시문과)에 丙科(병과)로 及第 忠淸道都事(충청도도사)를 지냈으며, 趙榮福(조영복)은 漢城府右尹(한성부우윤)을 歷任하였다.英祖 때의 趙重晦(조중회)는 1736年 庭試文科(정시문과)로 及第,大司憲(대사헌)을 거쳐 吏曺判書(이조판서)를 지냈다. 趙錫晋(조석진)은 畵家(화가)로 名聲(명성)을 떨쳤으며,山水(산수),人物(인물),花鳥等(화조등)에 모두 能(능)했다.高宗(고종)의 肖像畵(초상화)를 그린 功(공)으로 永春郡守(영춘군수)가 되고,品階(품계)가 正3品(정3품)에올랐다.獨立運動家(독립운동가)로서 이름을드높인 趙明河(조명하)는 1963年 大韓民國建國功勞勳章團章(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단장)을 授與(수여)받았고,趙鏞殷(조용은)은 臨時政府議長(임시정부의장)을 지내면서 時事促進會(시사촉진회)를 組織(조직)했다.그는 解放後(해방후)에 國民議會(국민회의)의 常任委員會議長(상임위원회의장)을 지내고, 1948年 南北協商(남북협상)에 贊同(차동)하여 平壤(평양)에 갔으나 失敗(실패)하고 1950年 5月에 있은 國會議員(국회의원) 選擧(선거)에 서울 城北區(성북구)에서 出馬(출마)하여 全國(전국) 最高得點(최고득점)으로 當選(당선)되었으나 6.25事變(사변)때 拉北(납북)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