始祖(시조) 趙連璧(조연벽)의 맏아들 趙岐(조기)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武將(무장)으로 벼슬이 大護軍(대호군)에 이르는동안 數次(수차)에걸친 蒙古軍(몽고군
)의 侵略(침략)을 물리치는데 功(공)을 세웠으며,次男(차남) 趙瑞(조서)는 左承旨(좌승지)를 지냈다.高麗忠烈王(고려충열왕)때 文臣(문신)으로 이름난 趙簡(조간)은 趙連璧(조연벽)의 셋째 아들로 어려서부터 詩文(시문)에 뛰어나 1279年(忠烈王 5) 文科에 壯元(장원)으로 及第(급제)하였으며 刑曹侍郞(형조시랑)·右諫議大夫(우간의대부)를 지냈다.
朝鮮時代(조선시대)에 와서는 端宗(단종)때 禁軍別將(금군별장)을 지낸 趙遂良(조수량)이 有名(유명)했다.그는 端宗(단종)이 首陽大君(수양대군)에 依(의)해 寧越(영월)로 流配(유배)될때 함께 가서 그 곳에서 殉節(순절)한 節臣(절신)이며, 그의 동생 趙友良(조우량)은 世宗(세종)때 興海郡守(흥해군수)를 歷任(역임)하였다. 그밖에 中宗(중종)때 學者(학자)로 이름난 趙潤乭(조윤돌)은 여러차례 벼슬에 薦擧(천거)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林泉(임천)에서 講論(강론)으로 一生(일생)을 보냈으며, 趙必達(조필달)은 捕盜大將(포도대장),楊州牧使(양주목사),訓鍊院都正(훈련원도정) 等을 歷任(역임)하였고,光海君(광해군)때 功臣(공신)趙時俊(조시준)은 1624年(仁祖2) 李适(이괄)의 亂(란)을 平征(평정)하는데 功(공)을 세워 豊城君(풍성군)에 追封(추봉)되었으며,戶曺參議(호조참의)를 歷任(역임)한 趙德述(조덕술),孝子(효자)로 이름난 趙吉權(조길권),趙恒燮(조항섭),趙昶鉉(조창현) 等과 學者(학자) 趙周昇(조주승),趙天衍(조천연)等이 家門(가문)을 빛낸 人物(인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