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麗時代(고려시대)에 平章事(평장사)를 지낸 趙仲璋(조중장)을 비롯하여 大提學(대제학)을 지낸 趙玉(조옥),兵部尙書(병부상서)를 지낸 趙文胃(조문위)
,門下侍中(문하시중)의 趙珍(조진),大將軍(대장군)의 趙天柱(조천주),檢校侍中(검교시중)의 趙瑄(조선) 等(등) 많은 官職者(관직자)들을 輩出(배출)하면서 繁盛(번성)하였다. 特(특)히,參贊門下府事(참찬문하부사)를 지낸 趙胱(조광)에 이르러서는 白川趙氏(배천조씨)家門(가문)이 더욱 繁榮(번영)하였다.그는 12歲(세)때 元(원)나라 燕京(연경)에 가서 漢文(한문)을 배우고,蒙古語(몽고어)를 通達(통달)하여 中書省譯史(중서성역사)로 있다가 歸國(귀국), 密直副使(밀직부사) 同知密直司事(지밀직사사) 지내고 1392年 李成桂(이성계)의 開國(개국)에 功(공)을 세워 開國功臣(개국공신) 2等(등)으로 復興君(부흥군)에 封(봉)해졌다.한편 趙琦(조기)는 開國功臣(개국공신)2等(등)으로 銀川君(은천군)에 封(봉)해지고 同知中樞院事(동지중추원사)를 지냈으며 門下侍郞贊成事(문하시랑찬성사)에 追贈(추증)되었다.
趙憲(헌.1544~1592)은 1567年 式年文科(식년문과)에 丙科(병과)로 及第(급제)하고,定州牧(정주목)敎授(교수)를 거쳐 通津縣監(통진현감),報恩縣監(보은현감),全羅道都使(전라도도사)를 지냈다.1591年 日本(일본)의 豊臣秀吉(도요토미히데요시)가 明(명)나라를 치기 爲(위)해 길을 열어줄것을 要請(요청)했을때 使臣(사신)을 斬首(수하)고 王(왕)에게 上疏(상소)했다.1592年 壬辰倭亂(임진왜란)이 일어나자 李瑀(이우) 敬伯(김경백)全承業(전승업)
等(등)과 함께 沃川(옥천)에서 義兵(의병)을 일으켜 1600餘名(여명)을 糾合(규합)하여 義兵將(의병장)이 되고, 僧兵(승병)과 合勢(합세)하여 淸州城(청주성)을 收復(수복)하였으나 全羅道(전라도)로 進擊(진격)하는 倭軍(왜군)에 맞서 錦山戰鬪(금산전투)에 參加(참가)하여 義兵(의병)들과 함께 싸우다 壯烈(장열)하게 戰死(전사)했다. 弟子9제자)들이 屍身(시신)을 한데모아 묻고"700義塚(의총)"이라 했다.그는 栗谷李珥(율곡이이)의 弟子(제자)中(중) 가장 뛰어난學者(학자)의 한사람으로서 李珥(이이)의 學文(학문)을 繼承(계승)發展(발전)시킨 儒學者(유학자)이다. 趙廷虎(정호)는 1612年式年文科(식년문과)에 乙科(을과)로 及第(급제),正字(정자)를 거쳐 察訪(찰방),著作(저작),典籍(전적)等(등)을 지내다가 兵曺判書
(병조판서)에 이르렀고,趙錫胤(조석윤)은 1626年別試文科(별시문과)에 丙科(병과)로 及第(급제), 吏曺正郞(이조정랑),丞旨(승지) 等(등)을 지낸 뒤 大提學9대제학)으로"仁祖實錄(인조실록)"의 編纂(편찬)에 參與(참여)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