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浚(조준)은 1374年(禑王 元年)文科(문과)에 及第(급제)하고 여러 官職(관직)을 거쳐 典法判書(전법판서)에 올랐다.1382年 崔瑩(최영)의 揮下(휘하)에서 體察使(체찰사)가 되어 倭寇(왜구)를 討伐(토벌)했고 이어 江原道(강원도)에 쳐들어온 倭寇(왜구)를 討伐(토벌)한뒤 벼슬에서 隱退(은퇴)해 있다가 1388年 威化島(위화도) 回軍(회군)으로 李成桂(이성계)의 勢力(세력)이 强化(강화)되자 大司憲(대사헌)에 올랐다.1390年 知門下府事(지문하부사)가 되어 土地改革(토지개혁)을 斷行(단행)舊勢力(구세력)의 土地基盤(토지기반)을 剝奪(박탈)하여 朝鮮開國(조선개국)의 經濟基盤(경제기반)을 굳게했다.1392年鄭道傳(정도전)等(등)과 李成桂(이성계)를 推戴(추대)하여 開國功臣(개국공신)1等(등)으로 兵權(병권)을 掌握(장악)했으나 世子冊封問題(세자책봉문제)로 太祖(태조)와 意見(의견)이 엇갈려 辭職(사직)하고 1400年 다시 太宗(태종)李芳遠(이방원)을 擁立(옹립)하여 領議政(여의정)에 올랐다. 土地制度(토지제도)에 該搏(해박)하고 詩文(시문)에도 뛰어났다.
趙晟(조성)은 1513年中宗(중종)8年(년)生員試(생원시)에 合格(합격)하고 醫藥(의약),算數(산수),天文(천문),地理(지리)等(등)에 正統(정통)하여 醫(의),算(산
)律(율)의 三學敎官(삼학교관)을 지냈다.뒤에 副司果(부사과)를 거쳐 義盈庫令(의영고령)에 이르렀다.性理學(성리학)에 밝았으며 글씨에도 能(능)했다. 趙昱(조욱)은 1516年(년)中宗11年(중종11년)生員(생원),進士(진사)兩試(양시)에 合格(합격),龍門山(용문산)에 隱居(은거)하며 學文(학문)이 알려져 龍門先生(용문선생)으로 일컬어졌다.明宗(명종)때 成壽琛(성수침),曺植(조식),成悌元(성제원)等(등)과 함께 賢士(현사)로 뽑혀 內贍寺主簿(내섬사주부)가 되고, 長水縣監(장수현감)에 이르렀다. 詩文(시문)과 書畵(서화)에 能(능)했으며 吏曺參議(이조참의)에 追贈(추증)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