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周元(김주원)은 金宗基(김종기), 金憲昌(김헌창), 金身(김신)等(등) 3名(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둘째아들 金憲昌(김헌창)은 憲德王(헌덕왕)때 公州地方(공주지방)에서 軍士(군사)를 일으켜 國號(국호)를 "長安(장안)"이라 하고 全羅道(전라도),忠淸道(충청도)地方(지방)을 占領(점령)했으나 失敗(실패)로 끝나 自決(자결)했다. 첫째 아들 金宗基(김종기)의 孫子(손자) 金陽(김양)은 838年(閔哀王1年) 軍士(군사)를 일으켜 僖康王(희강왕)을 죽게하고 王位(왕위)에오른 閔哀王(민애왕)을 除去(제거)하고 金祐徵(김우징)을 神武王(신무왕)으로 推戴(추대)하고 角干侍中(각간시중) 兼(겸) 兵部令(병부령)을 지냈다. 金順式(김순식)은 高麗(고려) 建國初(건국초) 溟州將軍(명주장군)으로 끝까지 抗巨(항거)하다 王建(왕건)에게 說得(설득)을 받고 王建(왕건)에게 協力(협력)하여 後百濟(후백제) 征伐(정벌)에 功(공)을 세웠다. 그後(후) 大匡(대광)에 오르고 王氏姓(왕씨성)을 下賜(하사)받았으나 朝鮮開國(조선개국)後(후)王氏(왕씨)가 彈壓(탄압)을 받자 原來(원래) 姓(성)인 金氏(김씨)로 還元(환원)하였다. 9世孫(세손) 金上琦(김상기)가 高麗(고려) 睿宗(예종)때 平章事[(평장사:內史門下省(내사문하성)의 正2品 벼슬)]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金仁存(김인존)은 門下平章事上柱國(문하평장사상주국)으로 高麗(고려)仁宗(인종)때翊聖同德功臣(익성동덕공신)에 冊祿(책록)되고, 學文(학문)과 文章(문장)에 뛰어나 重要(중요)한 國事9국사)가 있을 때마다 王(왕)이 그에게 諮問(자문)을 받았다. 朝鮮時代(조선시대)의 人物(인물)로는 生六臣(생육신)의 한 사람인 梅月堂(매월당) 金時習(김시습)이 代表的(대표적)이다. 1435年(世宗17年)成均館(성균관)附近(부근)에서 金日省(김일성)의 아들로 出生(출생)하여 어려서부터 神童(신동),神才(신재)로 불리워진 그는3歲(세)때 보리를 맷돌에 가는 것을 보고 아래와 같은 詩(시)를 읊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無雨雷聲何處動(비는 아니 오는데 천둥소리 어디서 나는가) 黃雲片片四方分(누런 구름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어지네)"
그가 5歲(세)때 中庸(중용)과 大學(대학)을 通達(통달)하여 이 消息(소식)을 接(접)한 世宗大王(세종대왕)이 그를 불러 寵愛(총애)했다고 하며,40餘年間(여년간)大司成(대사성)을지낸 金泮[(김반:後孫을 江西金氏(강서김씨)라 함]의 門下
(문하)에서 글을 읽고, 師範之宗(사범지종)으로 일컬어진 尹詳(윤상)에게 禮書(예서)와 諸子百家9제자백가)를 배웠다. 21歲(세)때인 1455年(端宗3年)三角山(삼각산)重興寺(중흥사)에서 工夫(공부)하다가 首陽大君(수양대군)이 端宗(단종)을 내몰고 王位(왕위)를 纂奪(찬탈)했다는 消息(소식)을 듣고 痛憤(통분)하여 읽던 冊(책)을 모두 불태워 버리고 중이 되어 이름을 雪岑(설잠)으로 고친 後(후) 放浪(방랑)의 길을 떠났다. 特(특)히 그는 世祖(세조)의 悖倫(패륜)에 痛憤(통분)하고 抵抗(저항)하며 9年 間(년간)을 放浪(방랑)하면서 "宕遊關西錄(탕유관서록)""宕遊關東錄(탕유관동록""宕遊湖南錄(탕유호남록)"等(등)을 整理(정리)하여 그 後志(후지)를 썼으며
,西紀(서기)1463年(世祖9年) 冊(책)을 求(구)하러 漢陽(한양)에 갔다가 孝寧大君(효령대군:太宗의 2男)의 勸誘(권유)로 暫時(잠시)世祖(세조)의 佛經諺解(불경언해)事業(사업)을 도와 內佛堂(내불당)에서 矯正(교정)일을 보았으나,1465年(世祖11年) 慶州(경주) 南山(남산)에 金鰲山室(금오산실)을 짓고 다시 入山(입산)하였다. 그後(후) 여러 次例(차례)世祖(세조)의 召命(소명)을 받았으나 拒切(거절)하고, 金鰲山室(금오산실)에서 우리나라 最初(최초)의 韓文小說(한문소설)인"金鰲新話(금오신화)"와 1468年(世祖13年) "山居百詠(산거백영)"을 썼다.西紀(서기) 1481年(成宗12年)還俗(환속)하여 安氏(안씨)를 아내로 맞이했으며,2年 뒤 다시 漢陽(한양)을 등지고 放浪(방랑)의 길을 나섰다가 忠淸道(충청도)鴻山(홍산
)無量寺(무량사)에서 生涯(생애)를 마쳤다. 司藝(사예)金忠貞(김충정)의 아들金添慶(김첨경)은 1549年(明宗4年)式年文科(식년문과)에 及第9급제)하여 正言(정언),御史(어사), 副修撰(부수찬), 持平(지평)等(등)을 거쳐 1561年(明宗16年) 書狀官(서장관)으로 明(명)나라에 다녀왔으며,僉正(첨정)을 지내고 江陵府史(강릉부사)로 나갔다가 뒤에 禮曹判書(예조판서)에 이르렀다. 그外(외) 監察(감찰)金宗胤(김종윤)의 아들 金忠烈(김충렬)이 中宗(중종)때 文科(문과)에 壯元(장원)하여 漢城府判官(한성부판관),京畿都事(경기도사)를 거쳐 春秋館編修館[(춘추관편수관:施政(시정)을 記錄(기록)하는官廳(관청)의 正
3品 벼슬)]으로 中宗實錄(중종실록)과 仁宗實錄(인종실록) 編纂(편찬)에 參與(참여)했으며, 金國坪(김국평)의 아들 金行(김행)은 宣祖(선조)때 茂長縣監(무장현감)이 되어 安平大君(안평대군:世宗의 셋째 아들)의 證道歌(증도가)를 刊行(간행)하고 光州牧使(광주목사)로 나갔다. 禮曺判書(예조판서) 金添慶(김첨경)의 玄孫(현손)인 金始爀(김시혁)은 工曹判書(공조판서)와 左參贊(좌참찬)을 歷任(역임)하고 判敦寧府事(판돈령부사)에 올랐으며,金始煥(김시환)과 金始炯(김시형)도 禮曹(예조) 및 兵曹判書(병조판서)를 歷任(역임)하여,漢城府判尹(한성부판윤),右參贊(우참찬),大司憲(대사헌)等(등)을 지낸 金啓洛(김계락)과 함께 이름을 날렸다. 1618年(光海軍10年)增廣文科(증광문과)에 壯元(장원)한 金起宗(김기종)은 金哲命(김철명)의 아들로 李适(이괄)의亂(란)때 都元帥(도원수) 張晩(장만)의 從事官(종사관)으로 武勳(무훈)을 세워 振武二等功臣(진무2등공신)으로 瀛海君(영해군)에 封(봉)해졌으며, 벼슬은 戶曺判書(호조판서)를 지냈다. 그밖의 人物(인물)로는 大司諫(대사간),慶尙道觀察使(경상도관찰사)를거쳐 吏曺(이조),禮曺(예조),戶曹(호조)의 判書(판서)를 歷任(역임)한 金尙星(김상성)과 英祖(영조)때 都承旨(도승지)를 지내고 耆老所[(기로소:朝鮮(조선)때 나이
가많은 文臣(문신)을 禮遇(예우)하기 爲(위)해 設置(설치)한 機構(기구)]에 들어가서 奉朝賀(봉조하)가된 金尙翼(김상익),禮曹(예조) 및 刑曹參判(형조참판)을 歷任(역임)한 金尙迪(김상적)이 有名(유명)했다. 金始炫(김시현)의 아들 金尙重(김상중)은 英祖(영조)때 大司憲(대사헌)과 大司諫(대사간) 을 거쳐 工曹判書(공조판서)에 이르러,右參贊(우참찬)을 지낸 金尙集(김상집)과 學者(학자)로 有名(유명)한 金鴻運(김홍운), 刑曹判書(형조판서) 金華鎭(김화진)等(등)과함께 名門(명문)의 傳統(전통)을 이었으며,金尙喆(김상철)은 1775年(英祖51年)領議政(영의정)에 올라 學德(학덕)으로 王(왕)의 信任(신임)을 받았고, 일찍이 右議政(우의정)때 編輯廳(편집청)을 두어"東國文獻備考(동국문헌비고)"를 編纂(편찬)케 함으로써 뒷날 많은 便宜(편의)를 가져오게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