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송정 종가를 드나든 것은
어린나이의 학생때 부터였다.
진성 이가 , 학생 화수회의 답사로 부터
여러번 다녀가지만
이상하게도 매번 느낌과 감상은 다르기만 하다.
이곳이 해동주자라 하는
퇴계 어른의 태실이 있어서 그러기도 하지만
도산, 온혜라 하면 역시 이곳이 중심이다.
사람들은 하계 종가나 상계 를 자주 거론하지만
그 뿌리는 역시 이곳 노송정 종가라 할것이다.
나는 윗대에서 갈려나온 방계 후손이지만
우리가 사회나 지역에서 인정과 대접을 받는건
이곳을 뿌리하여 나름 산간오지라는 지역적 어려움을
노력과 정성으로 극복하고
역사를 바로 보려는
시대정신을 잃지 않은 덕분이라 그럴것이다.
오늘은 다 늙어 시간도, 여유도 넉넉한 덕분에,
그리고 요즈음 소일하고 있는 똑닥이 카메라로
이렇게 영상일지를 쓰면서,
돌아보는 모습들이 조금은 유별나다싶이 자세하게 되었다.
마침 번와작업과 수리가 한창이어서
조금은 어수선 하였지만,
그래도 다행히 어지간히 정리가 되어 있어서
돌아보는 발길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동행한 친구에게 아무런 얘긴 하지 않았지만
내가 무얼 얘기 하고 싶어하는지 마음으로 느꼈을 것이다.
어른들은 이렇게 삶을 뜨겁게
그리고 의미있게 살으셨는데
우리는, 나는
후대에 무슨 삶을 어떻게 살았다 이야기 할꼬?....
오늘은 조금은 숙연해져서
마음에 의미를 담았다.
혹 도움이 될까해서
우리 친구들과도 나눌까해서
몇장의 사진과
웹에 있는 자료하나를 붙혀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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老松亭 종택
1. 位置:安東市 陶山面 溫惠里 604番地
노송정은 안동에서 청량산으로 가는 35번 국도를 따라 30km 정도 떨어진 온혜리에 있다. 온혜리는 1·2·3리로 나누어지며 노송정은 온혜리의 중간에 자리 잡고 있다하여 중마로 부르는 온혜 2리에 있다. 이 곳에는 국도 왼편으로 퇴계 선생의 숙부인 송재선생신도비(松齋先生神道碑)와 온혜초등학교가 있고 온혜초등학교를 지나면 노송정 종택을 만날 수 있다. 노송정 종택은 단종 2년(1454)에 퇴계의 조부인 이계양이 세웠는데 퇴계가 태어난 곳이라 하여 퇴계태실(退溪胎室)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2. 堂號의 由來
이 집은 단종 2년(1454)에 퇴계의 조부인 이계양(李繼陽) 선생이 세웠는데 후에 몸채의 중앙 돌출된 방에서 퇴계 선생이 태어났다 하여 ‘퇴계태실’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이계양은 노송정으로 호를 지어 당호로 삼았다. 정침의 동쪽에 ―자형 평면의 정자인 노송정이 자리잡고 있으며 정자 앞에 당호로 부르게된 노송(뚝향나무)이 심겨져 있다.
이 나무의 유래를 기록한 노송기(老松記)에는 세종조 선산부사를 지낸 이정(李禎)이 판관으로 재직시 북쪽 오랑캐의 침공을 막기 위한 평북도 영변진 설치와 약산성 증축의 대역사를 감독하여 공적을 남기고 귀향 길에 약산의 향송을 3주 옮겨와 심었다.
한 그루는 본가인 경류정 앞에 심고, 또 한 그루는 공의 셋째 아들인 판관공(이계양)이 온혜 기지를 열 때 심었으며, 나머지 한 그루는 외가 쪽 후손인 선산 박씨 가(家)에 심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 세 그루의 나무 중 온혜 노송정의 나무는 임인년 폭설로 동사하여 현재 심겨져 있는 나무는 지금부터 약 62년 전에 경류정의 뚝향나무에서 가지를 취목하여 옮겨 심은 것이다. 또한 선산 박씨 가의 나무는 임진왜란 당시 왜병이 뿌리를 잘라 죽였음으로 현재는 두루종가(경류정)의 나무만이 전한다.
퇴계가 엮은 온계전거사적(溫溪奠居事蹟)에 의하면 공(이계양)은 처음 예안현 동쪽 부라촌(浮羅村, 지금은 예안면 부포)에 살았는데 봉화현교도(奉化縣敎導)가 되어 봉화로 부임하는 길에 온계를 지날 때 주변 산수의 아름다움에 취해 이리 저리 거닐다가 신라현이라 부르는 고개에 이르러 잠시 쉬고 있노라니 한 스님이 지나가다가 함께 쉬면서 온계의 산수를 이야기하다가 서로의 의견이 일치함으로써 스님과 다시 온계로 내려와 주위를 둘러보고 현재의 종택 자리를 구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스님의 말에 따르면 “이 곳에 집을 짓고 살면 반드시 귀한 아들을 얻으리라”고 하여 공이 그 말을 따랐다고 한다. 그 때에는 온계의 시냇가에는 한 집만이 살고 있었는데 둘레에 묵은 땅이 많아 농사지을 농토가 넉넉했고 물을 끌어 논을 만들 수도 있었으며, 나무숲이 울창하고 깊은 골짜기가 있어 항상 맑은 냇물이 흘러 물고기도 많았다고 한다.
공이 이 곳에다 세거지를 마련하고 은거한 후 두 아들을 낳으니 독실한 지행(志行)에 한 생애를 학문에 침잠한 진사 식(埴)과 참판에 관찰사를 지냈으며 시문에 뛰어난 송재공(松齋公) 우(?)이다. 특히 진사 식의 7남 1녀 중 막내인 퇴계를 배출함으로써 영남의 명문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3. 建築物의 構成과 配置
노송정 종택의 평면구성은 ㅁ자형의 정침과 노송정, 사당채 공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성림문(聖臨門)이란 편액이 걸려 있는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왼편으로 정침이 자리잡고 있고 정침의 오른편에 노송정과 사당채가 자리잡고 있다.
성림문의 편액이 걸려 있는 행랑채는 대문을 가운데 두고 좌우 5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행랑채는 정면 6칸 측면 1칸의 규모이고 맞배지붕이다. 자연석 주초석을 놓고 그 위에 기둥을 세웠는데 왼편 2칸은 광과 방의 순서로 배치되어 있고 오른편은 방 1칸과 2칸 통의 광으로 구성되어 있다. 솟을대문으로 된 대문에는 퇴계의 어머니인 춘천 박씨 부인이 “공자가 대문 안에 들어오시는 꿈을 꾸고 퇴계를 낳았다”고 하여 공자와 같이 훌륭한 성인이 들어온 곳이라는 뜻으로 성림문(聖臨門)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연유가 기록되어 있는 ‘성림문중수기’와 ‘성림문’ 편액이 게첨되어 있다.
팔작지붕에 홑처마로 이루어져 있는 몸채는 ㅁ자형의 평면으로 배치되어 있다. 대부분 ㅁ자형의 평면인 경우에는 몸채의 안마당 공간이 정방형의 마당을 이루고 있으나 이 집의 경우에는 안마당 공간에 정침으로부터 돌출된 태실이 마련되어 있는 독특한 구조를 하고 있다. 몸채는 사방 7칸 규모이다. 정면 7칸은 가운데 중문을 내고 좌우에 3칸씩 배치되어 있다. 죽담은 자연석 허튼층쌓기로 상당히 높은 규모이다.
중문을 중심으로 오른편은 사랑채 공간이다. 사랑채는 2칸 통의 사랑방과 1칸의 대청으로 공간을 나누었고 앞으로 반 칸의 툇마루를 내고 계자난간을 돌렸다. 대청은 몸채의 우측면 작은 사랑방과 연결된 구조를 하고 있다. 사랑채의 대청에 온천정사(溫泉精舍)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중문의 왼편으로는 판벽으로 된 봉당이 1칸이고, 그 옆으로 방 1칸 마루 1칸이 분할되어 있으며 앞쪽으로 난간이 없는 툇마루를 놓았다. 중문을 열고 들어서면 안채 공간으로 이어진다.
중문을 열고 들어서면 안채공간으로 연결되는데 왼편에 1칸 규모의 봉당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구조는 상당히 특색이 있는 것으로 중문을 열었을 경우에 안채가 훤히 보이는 것을 막기 위하여 내외벽으로 막았기 때문에 봉당을 거쳐야만 안채로 들어 갈 수 있도록 배치하였다. 중문을 열면 곧 바로 안채가 보이지 않도록 내외벽을 설치하였는데 특히 안채의 안마당 공간에 돌출된 퇴계태실이 자리잡고 있어 외부의 방문자들이 안채 공간을 들여다보지 못하게 막혀있다. 내외벽은 중문을 마주하며 판벽으로 되어 있는데 다른 집에 설치된 내외벽은 전체가 막힌 구조를 하고 있으나 이 집의 경우에는 벽 전체를 막은 형태가 아니고 상부는 개방되어 있어 이렇게 열린 공간으로 안마당에 돌출 되어 있는 태실에 게첨되어 있는 ‘퇴계선생태실’이라 적혀있는 편액이 잘 보이도록 되어 있어 방문자들이 더욱 몸가짐을 조심하도록 하였다.
봉당을 통하여 안마당으로 들어서면 여느 ㅁ자집의 경우와는 달리 답답한 느낌을 받는다. 이것은 안마당 공간이 탁 트인 것이 아니라 정침으로부터 연결된 정면 1칸 측면 1칸 반 크기인 태실이 돌출 되어 안마당 공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방에서 퇴계 선생이 태어났다고 하여 퇴계선생태실이라 부른다. 태실은 누각형의 건물로 사방 1칸 크기인 방과 앞으로 반 칸 크기의 마루와 좌우측면에 쪽마루를 내고 계자난간을 돌렸다. 방은 정침으로부터 연결되는 곳에 출입문인 여닫이문을 달고 나머지 3면은 쌍여닫이문과 미닫이문을 이중으로 내어 방안이 언제나 환하게 밝혀지도록 하였다. 태실 앞쪽으로 반 칸 규모의 누마루를 내었고 천장은 일반 집에서 잘 볼 수 없는 우물천장을 돌려 격조를 높였다. 이 누마루에 퇴계선생태실이란 편액이 게첨되어 있다.
정침은 왼쪽에서부터 2칸의 부엌, 2칸의 안방, 2칸의 대청과 1칸의 건너방으로 배치되어 있다. 부엌은 서쪽 측면의 찬방과 연결되는 1칸과 안마당에서 부엌으로 들어갈 수 있는 공간 1칸으로 2칸 통이다. 부엌 위로는 안방에서 올라갈 수 있는 다락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안방은 정면 2칸 통이고 측면 1칸 규모이다. 정면으로 반 칸의 툇마루를 설치하여 태실과 연결되어 있다. 대청은 2칸의 규모로 우물마루를 깔았고 뒷벽에는 바라지창을 달았으며 천장은 연등천장이다. 대청 건너편에 상방을 낸 구조인데 몸채의 우측면으로 2칸 통의 규모이다. 몸채의 우측면에는 가운데에 문을 내고 왼쪽으로는 작은 사랑방과 연결되고 오른쪽으로는 상방과 연결된다.
몸채의 동쪽에 ―자형 평면의 노송정이 자리잡고 있다. 노송정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규모이고 왼쪽에 2칸 통의 방을 내고 방의 앞쪽에 1칸 크기의 마루를 내어 전체평면의 구조는 ‘ㄱ’자를 눕혀놓은 구조이다. 노송정 당호가 게첨되어 있는 이 건물은 자연석쌓기의 기단에 자연석 주초석을 놓고 기둥을 세웠다. 지붕의 형태는 팔작지붕이고 홑처마에 오량가구이다. 천장은 연등천장이다. 대청은 전체 6칸의 규모로 상당히 넓은 평면을 가지고 있어 제사를 받들 때에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다. 대청과 방을 구분 짓는 곳에는 4분합문을 달아 필요에 따라 문을 열고 들어올릴 수 있는 구조를 하였다. 우측면과 뒷벽에는 하방과 중방 사이에는 바라지창을 달고 중방과 상방 사이는 흙벽으로 마감하였다. 대청에는 노송정(老松亭), 해동추로(海東鄒魯), 온계서족흠(溫溪敍族歆), 산남락민(山南洛?) 등의 편액이 걸려 있다.
노송정의 동쪽에 위치한 사당채는 외문으로 된 문과 낮은 흙담장으로 구획이 정해졌고, 그 안에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규모인 사당이 모셔져 있다. 사당 건물은 맞배지붕에 풍판을 설치하고 홑처마이다. 기단은 다듬돌을 사용하여 바른 층 쌓기로 낮게 단을 쌓고 그 위에 자연석 주초를 놓고 기둥을 세웠다. 내부에는 북쪽으로 선반을 만들고 그 위에 감실을 놓고 위패를 모셨으며 감실 앞에 제상이 놓여져 있다. 정면 3칸에는 궁판이 있는 띠살문을 내고 앞에 반 칸의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노송정과 사당채 사이에 뚝향나무가 심겨져 있다.
4. 둘러보기
이 건물은 도산서원을 지나 고개를 넘어 온혜, 이름 그대로 따뜻한 냇물인 온천이 터져 나온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초등학교 쪽을 따라 가다보면 늙은 소나무 사이로 종택의 모습이 보인다.
1454년(단종 2)에 퇴계 이황의 할아버지인 이계양이 건립하였다고 전하는 집이다.
당호인 ‘퇴계태실’은 몸채 중앙에 자리한 튀어나온 방에서 퇴계 이황이 태어난 데서 비롯되었지만, 건물 전체의 이름은 그의 할아버지 이계양의 호를 따라 노송정종택이라 부른다.
14대손인 이가원에 의해 중수되었고, 1930년대 전면 개축이 있었다.
몸채는 정면 7칸, 측면 6칸이며 안동의 전형적인 사대부집의 형태인 口자형으로 중앙에 퇴계태실이 있다. 몸채 동쪽으로는 一자형으로 독립해서 세워진 노송정이 있고 사당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조선시대 사대부집의 형태를 갖추었다.
1)건물이야기
명 칭 : 진성이씨 노송정종택(眞城李氏 老松亭宗宅)
소 재 지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 604
건 축 주 : 이계양(李繼陽, 1424~1488)
건축시기 : 1454년(단종 2)
소 유 자 : 이창건(관리자 : 이창건)
문 화 재 :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60호, 1985년 10월 15일 지정, 4동
2)건축 배경
두루에서 진성이씨 가문의 삶터를 온혜로 옮긴 사람은 선산부사 이정이 낳은 9남매 중의 막내아들인 이계양(李繼陽)이다. 그의 호는 노송정(老松亭)이다. 노송정공 이계양은 단종이 폐위되자 출사를 단념하고 초야에 묻혀 살기를 결심하며, 온혜의 들을 택하여 집을 짓고 들어앉았다.
3)건축 특징
퇴계태실은 口자 형상의 비좁은 안마당 북쪽에서 목젖처럼 남쪽을 향하여 돌출되어 있다. 안방, 또는 안채의 마루와 쪽마루를 사이에 두고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쪽마루와 연결되지 않은 3면은 좁직한 난간이 둘러쳐져 있다. 남쪽 방향의 난간은 좀 넓은 마루를 안고 있다. 두 사람이 앉아서 작은 상을 받을 수 있는 정도의 공간이다.
태실 안은 아주 비좁다. 『퇴계선생과 도산서원』 속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길이는 큰 사람이 누우면 머리와 발끝이 양쪽 벽에 닿을 만하였고, 폭은 두 사람 정도가 겨우 누울 수 있는 여유만을 갖추고 있었다. 퇴계는 연산군 재위 7년, 1501년에 이 방에서 태어난다. 아버지는 진사공 이식, 어머니는 정경부인 박씨이다. 태실이 좁직한 마당 한가운데 들어서 있고, 마당가로는 사방으로 방이 둘러싸고 있으니, 거기서 몸을 풀던 퇴계 이황의 모친은 비명소리 하나 마음대로 내지를 못하였으리라! 태실 안 좁은 공간 속에서 이를 악물고 버텨내는 정경부인 박씨의 땀으로 얼룩진 얼굴이 떠오르지를 않는가?”
태실 남쪽 처마 밑에는 ‘퇴계선생태실’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살지고 둔중한 느낌이 드는 글씨이다. 남쪽의 조금 넓은 난간마루 위에 서 있는 두 개의 원형기둥은 나뭇결의 무늬가 뚜렷하고 아름답다.
태실이 口자 형상의 안마당 안쪽으로 돌출하여 있으므로, 안마당은 ㄷ자 형상의 좁은 공간으로 되어 버렸다. 좁은 안마당은 회칠이 되어 있었는데도 얼마쯤의 빛살이 비집고 들어온다. 처마 끝선을 타고 들어온 빛줄기가 안마당의 시멘트 위에 굴곡진 그늘을 만들어 준다.
4)건물 구성
대문채, 노송정, 본채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쪽 끝이 사당이고, 그 다음이 노송정이고, 서쪽에 본채가 있다. 口자 건물의 본채에는 앞쪽으로 사랑채가 있다. 안마당은 통상의 경우보다 좁고, 안채로부터 그 한가운데로 방 하나가 튀어나와 있는 구조이다. 본채 건물의 고매기에 기와조각으로 만들어 넣은 그림이 아주 매력적이다. 그러나 보수할 때마다 그림의 모양이 바뀌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5)현판
노송정(老松亭)
이계양의 호이면서 이 집의 당호이다. 이계양이 처음 여기 들어왔을 때 주변에 늙은 소나무가 많았으므로 노송정이라는 호를 지었다고 한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앞에 보이는 바깥마당의 정자 건물에는 노송정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2)성림문(聖臨門)
종택으로 향하는 길을 걸어 들어가면, 처음으로 통과하게 되는 문에 걸려 있다. 그 위로는 그 문을 왜 성림문이라고 하는지를 설명하여 놓은 현판이 붙어 있다. 퇴계 이황의 모친인 춘천박씨가 공자가 문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퇴계 이황을 낳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3)해동추로(海東鄒魯)
노송정 마루방 안에 서면, 동쪽 벽에 보인다. 노나라의 추 땅은 공자가 태어난 곳이다. 그곳과 온혜를 상호 연결시켜 바라보는 의식을 담고 있는 현판이다.
4)산남낙민(山南洛?)
서쪽 벽에 있는 현판이다. 낙읍은 정호·정이 형제가 살았던 곳이고, 민 땅은 주자의 삶터였다. 정이에서 주자로 이어지는 흐름이 우리의 조선시대를 장악한 주자학을 생산하여 낸 것이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가 ‘해동추로’가 뜻하였던 것과 같다는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5)퇴계선생태실(退溪先生胎室)
태실 남쪽 처마 밑에 붙어 있다. 살지고 둔중한 느낌이 드는 글씨이다.
6)온천정사(溫泉精舍)
사랑의 동편에 걸려 있고, 남쪽에 있는 두 개의 현판과 한 사람의 작품이다. 글씨는 획이 가늘고 미끈하다.
5. 문중 이야기
- 터를 잡다
처음 이곳에 기지를 잡고 들어올 때 이미 의성김씨가 살다가 옮겨간 터전이었다고 하기도 하고, 도력이 높은 승려가 이곳이 집터가 될 만한 곳이라고 알려주어 들어오게 되었다고 하기도 한다.
- 온혜종가
안동시내에서 도산서원으로 나가는 길은 35번국도, 이름하여 퇴계로이다. 퇴계로가 기찻길을 지나면서 이하마을로 들어가는 좁은 길이 좌측으로 열리고, 그 길을 따라가다 보면 두루마을에 이른다. 두루마을에서 동쪽으로 난 길을 따라 나가면 와룡 쪽의 35번 국도를 다시 만나게 된다. 그 길을 따라 가서 도산서원을 지나 고개를 넘으면 온혜. 도산면 소재지이다.
진성이씨 온혜종가로 들어가는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온천 때문에 새로 난 길 쪽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옛날처럼 온혜초등학교 쪽으로 난 길을 통해서 들어가는 것이다.
온혜초등학교 정문 앞에는 「송재선생신도비(松齋先生神道碑)」가 서 있다.
“이 비는 송재 선생 유허에 기념탑의 성격을 담아 세운 신도비이다. 선생은 이곳에서 1469년 4월 14일 진성이씨 시조(휘, 석)의 5대 손, 판서공(휘, 계양, 호, 노송정)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셔서 …… 1498년에 급제하시어 …… 환로의 비리를 개탄하시고 고향으로 돌아오시어 시작과 저서에 전념하시는 한편 가질들과 후배 교육에 힘쓰시다가 1517년 11월 8일에 향년 49세로 세상을 떠나셨다.”
1988년에 완성된 신도비 앞에 세워져 있는 작은 안내판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신도비를 지나서 안쪽으로 쑥 들어가면 밭 가운데 길에 서 있는 멀쑥한 모양의 소나무 세 그루가 보이고, 그 사이로 멀찍이 온혜종가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온혜종가를 찾아가려면, 초등학교 쪽 길을 택하는 것이 제격이다. 노송정으로 들어가기 전에 노송들 사이로 노송정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온혜종가 앞에 서면, 보는 쪽을 기준으로 해서 오른쪽은 밭이지만, 왼쪽에는 두 채의 집이 앞으로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제일 앞쪽의 집 마당에는 꽤 커다란 뚝향나무가 자리 잡고 있다. 두루의 그것과 같은 형상이지만, 좀 젊은 나무이다. 그런 까닭에 섣부르게 원래의 뚝향나무가 임인년 폭설에 동사한 후에 두루에서 새로 가져다 심은 것은 아닐까 하는 예단을 하게 된다.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 조부님이 문경서 가져다 심은 것입니다.”
그 집의 울을 고치고 있던 노인이 말하였다.
“종가 것은 합방 때 죽고 두루서 가져온 것도 죽었어요.”
그러나 그 집 울을 고치던 노인은 자신의 조부님의 문경에서 가져다 심은 것이라고 한다. 덧붙여 종가 것은 합방 때 죽고, 두루서 가져온 것도 죽었다고 한다.
노인의 정보가 얼마나 정확한지는 모를 일이었다.
퇴계종택의 대문인 ‘성림문’ 안은 바깥마당이다. 바깥마당의 북쪽 경계, 북쪽으로 흘러내린 산기슭 발치에는 노송정이 있다. 온혜의 종택에서 노송은 볼 수 없다. 밭머리 동쪽으로, 산기슭 윗쪽으로, 소나무는 멀리 비켜나고, 노송정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새로 기와를 이어서, 지붕이 검은 빛으로 반짝이는 모습이 생경하기만 하다.
노송정은 규모가 크다. 4칸 규모의 복집이다. 동쪽의 3칸은 마루이고, 서쪽의 1칸은 방이다. 방의 앞에는 마루가 또 만들어져 있고, 그 밑으로 아궁이가 보인다. 방 쪽이 그 앞의 마루만큼의 넓이로 전면으로 튀어나와 있다.
온혜종택에서 눈여겨볼 만한 것은 퇴계태실, 그리고 안채와 사랑채의 고매기이다.
- 이황의 태몽
성림문이라는 현판이 내걸린 이 집의 대문에는 또한 「중수기」가 판각되어 높이 매달려 있다.
“연산 7년, 신유년 11월 기해일, 진시에 퇴계 선생이 온계리 집에서 출생하셨다. 그 하루 전날 선생의 모친이신 정경부인 춘천박씨께서 공자가 문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으니, 참으로 좋은 꿈이었다.”
「중수기」의 내용은 대충 그러하였다. 퇴계 이황의 태몽이야기라고 하겠다.
6. 인물이야기
- 이계양(李繼陽, 1424~1488)
이계양은 자가 달보(達甫)이다. 1424년에 태어나서 1488년에 타계하였다. 1453년 진사이다. 1455년에 단종이 왕위를 세조에게 물려준 후 출사를 단념하였고, 예안의 온혜로 옮겨와 머물러 살게 되었다. 어려서 백숙조(伯叔祖) 이중위(李仲位)의 집에서 길러졌는데, 중위의 집은 부유하기는 하였지만 깨우쳐 주는 것이 없었다. 분발하여 학문에 뜻을 두었다. 이계양의 집 주변에 양전 수백 이랑을 경작하여 비로소 조금 경제적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부사직 김유용(金有庸)의 여식과의 사이에서 이식(李埴), 이우(李?) 두 아들을 두었다.
- 이식(李埴, 1463~1502)
이식은 자가 기지(器之)이고, 1463년에 태어나 1502년에 죽었다. 1501년 진사이다. 첫 부인 의성김씨 한철의 딸과의 사이에서 이잠(李潛), 이하(李河) 두 아들을 얻고, 두 번째 부인 춘천박씨와의 사이에서 이의(李?), 이해(李瀣), 이징(李澄), 이황(李滉) 네 아들을 얻었다.
- 이우(李?, 1469~1517)
이우는 자가 명중(明仲)이고, 호가 송재(松齋)이며, 1469년에 태어나 1517년에 죽었다. 묘는 수곡에 있다. 1492년 생원이고, 1498년에 문과 급제하여 벼슬이 참판에 이르렀다. 퇴계 이황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다. 청계서원에 배향되었다. 정부인 월성이씨와의 사이에 아들 이수령(李壽?)이 있다. 이수령은 자가 대년(大年)인데, 1502년에 태어나 1539년에 죽었다. 세마찰방(洗馬察訪)이다. 묘는 건지산에 있다. 의인 평산신씨와의 사이에 이빙(李憑) 등 세 아들을 두었고, 이빙은 이일도(李逸道)를 낳았다.
- 이잠(李潛, 1479~1536)
이식의 큰아들 이잠은 충순위로, 1479년에 태어나 1536년에 죽었다. 묘는 고산(孤山)에 있다. 안동권씨와의 사이에서 이인(李寅)을 낳는다. 이인은 자가 경부(敬夫)이고, 1502년(성화 임인년:『세보』의 성화는 홍치의 오자일 것이다.)에 태어나 1530년에 죽었다. 퇴계의 칭송을 받았던 조카이나 일찍 죽어 고산에 묻혔다. 봉화금씨와의 사이에 딸들만 있다.
- 이하(李河, 1482~1544)
이식의 둘째 아들 이하는 자가 청지(淸之), 또는 경원(景源)이고, 1482년에 태어나서 1544년에 죽었다. 훈도이다. 예천 금곡리(金谷里)에 살았다. 묘는 고산에 있다. 의인 함양박씨와의 사이에 이완(李完), 이굉(李宏), 이성(李宬) 세 아들을 두었다. 이완은 자가 자고(子固)이고, 호가 기암(企庵) 또는 요산(樂山)이다. 1512년에 태어나 1596년에 죽었다. 묘는 수곡에 있다. 배위 의인 초계변씨와의 사이에 이종도(李宗道) 등 네 아들을 두었다. 온혜종파는 이종도 계열로 이어진다.
- 이의(李?, 1449~1532)
이식의 셋째 아들 이의는 자가 언장(彦章)인데, 충순위이다. 1494년에 태어나서 1532년에 죽었다. 용궁에 옮겨가 살았으며, 외가인 박씨 가문의 제사를 받들었다. 묘는 예안 연곡에 있다. 배위는 의인 고성이씨이며, 이선(李宣), 이헌(李憲), 이재(李宰) 세 아들을 두었다.
- 이해(李瀣, 1496~1550)
이식의 넷째 아들 이해는 자가 경명(景明)이고, 호가 온계(溫溪) 또는 취미헌(翠微軒)이다. 1496년에 태어나서 1550년에 죽었다. 1525년 진사이고, 1528년 문과 출신이다. 벼슬이 대사헌에 이르렀으며, 청계의 삼봉서원(三峯書院)에 배향되었다. 정부인 연안김씨와의 사이에 이복(李宓), 이녕(李寗) 등 여섯 아들을 두었다. 이복은 예천 신당동에 살았으며, 자손이 없다. 이녕은 자가 노경(魯卿)이고 호가 만랑(漫浪)이며, 1527년에 태어나서 1588년에 죽었다. 진사인데 음사로 현감을 지냈다. 묘는 연곡에 있다. 배위 경주이씨와의 사이에 유도(有道)가 있다.
- 이징(李澄, 1498~1582)
이식의 다섯째 아들 이징은 자가 경청(景淸)이고 호가 이옹(伊翁), 신야(莘野)인데, 1498년에 태어나 1582년에 죽었다. 유일로 천거되어 참봉이 제수되었으니 나아가지 않았고, 나중에 찰방이 제수되었다. 묘는 수곡에 있다. 봉화금씨와의 사이에 두 아들이 있다.
- 이황(李滉, 1501~1570)
이식의 여섯 째 아들 황은 자가 경호(景浩)이고, 호가 퇴계(退溪)이며, 1501년에 출생하여 1570년에 타계하였다. 1528년 진사이고, 1534년 문과 출신이다. 벼슬이 판중추에 이르렀고, 증직으로 영의정이 내려졌다.
시호는 문순(文純)이며, 문묘에 배향되었다. 묘는 건지산 남쪽 기슭에 있다. 첫째 부인은 김해허씨인데 이준(李寯), 이채(李寀) 두 아들을 두었으며, 측실에게서 이적(李寂)이라는 아들을 낳았다. 둘째 부인은 안동권씨인데 자식이 없다. 첫 부인의 묘는 영주에 있고, 둘째 부인의 묘는 건지산 동쪽기슭에 있다.
7. 온혜마을 이야기
- 온천으로 은혜를 베푼 마을
온혜는 안동에서 북쪽으로 청량산 가는 35번 국도를 따라 30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동네로, 예부터 온천(溫泉)이 있어서 여러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게 되었다고 하여 온혜(溫惠)라 이름 붙여진 마을이다.
구한말에는 예안군 의서면에 속했으며, 1914년 사곡리·고산리를 병합하여 온혜동·온혜리로 안동군 도산면에 편입되었다가 1995년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온혜리는 온혜 1리와 온혜 2리, 온혜 3리로 나누어지는데 논실, 건지골, 동작골, 고산, 삐끼실은 온혜 1리에 속하고, 중마, 합강, 청계마을은 온혜 2리에, 그리고 배미골과 평지, 상촌은 온혜 3리에 속한다.
마을 앞으로 흐르는 온혜천(溫惠川)은 도산면 용두산에서 발원하여 남으로 흘러 온혜에 이르는데, 온천물이 흐르는 개천이므로 온계(溫溪)라고도 부른다. 이 물은 북쪽에서 오는 태자리의 물과 합하여 큰 내를 이루어 꺾이고, 동남쪽으로 흘러 토계리에 이르러 퇴계(退溪)가 되고, 토계리의 남쪽에서 낙동강(洛東江)으로 들어간다.
온계는 온혜리 가운데에 있다 하여 중(中)마 혹은 중리(中里)라 한다. 마을 앞의 온계 때문에 온계촌(溫溪村)으로 불렸으며, 퇴계 이황의 중형 이해(李瀣)가 온계를 자호(自號)로 삼았다.
약 550년 전 이황의 조부인 노송정(老松亭) 이계양(李繼陽, 1424~1488)이 입향하였으며, 경내에는 퇴계태실(退溪胎室)이 있는 노송정종택을 비롯하여 고택이 많아 온혜의 중심 마을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합강(合江)은 도산면사무소가 있는 곳으로 운곡리에서 내려오는 냇물과 태자리에서 내려오는 냇물이 합쳐지는 곳이다.
온혜리 장터에서 도산온천으로 들어가는 다리 청계교는 1667년(현종 8) 창건되었다.
이황의 아버지인 이식(李埴), 숙부인 송재(松齋) 이우(李?), 중형인 온계를 배향하는 청계서원(淸溪書院)이 있었으나 서원철폐령으로 1869년에 없어졌다.
상온(上溫)은 온혜리 위쪽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 중기의 학자인 의병장 용담(龍潭) 임흘(任屹, 1557~1620)이 400여 년 전에 입향하였다고 한다.
임흘은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과 월천(月川) 조목(趙穆, 1524~1606)에게 배웠으나 영달에 뜻이 없어 안동부 내성현(乃城縣) 용담(龍潭:봉화 해저 건너편)에 살고 있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倡義)하였다.
온혜마을은 주자학(朱子學)을 집대성한 대유학자(大儒學者)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 이 태어난 유서 깊은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