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正熙와 ‘쓰루(鶴)’, 全斗煥과 ‘Dr. 金’ (펌)
1960년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이끈 金鶴烈과 1980년대 ‘안정화 정책’를 입안한 金在益 |
< 한국 경제사의 두 가지 흐름 >
한국 경제사를 관류한 두 가지 흐름을 본다면 하나는 1960~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이 중화학공업을 육성해 국가경제를 폭발적으로 성장시킨 것이고, 다른 하나는 1980년대 전두환 대통령이 물가안정을 중심으로 국민경제체제의 土臺(토대)를 마련, 개발도상국으로는 유래가 없는 3低(저) 호황(低유가, 低달러,
低환율)의 물결을 타게 되는 것이다.
두 대통령의 경제에 대한 집념은 놀라울 정도였다. ‘부국강병’만이 공산주의를 이길 수 있다는 신념으로 가득 찬 박정희와 전두환은 다른 나라의 軍部(군부) 지도자와는 달리 적극적인 개방, 투자유치, 중산층 활성에 열을 올려 지금의 경제규모 11위에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 박정희와 ‘쓰루’ >
박정희에겐 수 많은 경제참모가 있었지만 영향을 끼친 비중에 비해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 ‘쓰루(鶴)’라는 별명의 주인공 金鶴烈(김학렬) 前
경제부총리(1923~1972)이다. 그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입안한 주인공
으로 알려져 있으며, 3공화국 초기 국가경제의 방향을 지휘한 산업화의 역군이었다. 일본 주오대학(中央大學)을 졸업한 김학렬은 1950년 고등고시(행정고시의 전신) ‘1호 수석생’으로 5.16 혁명 이전부터 박정희와 안면이 있었다. 고시 합격 후 재무부 관리과장으로 있을 때 육군 소장이었던 박정희는 그의 집에
찾아와 ‘무능한 장면 정권을 대신해 경제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었다고
한다. 秀才(수재)형 경제관료였던 그를 일찍이 알아차린 사람이 바로 박정희였다.
< 경제대통령의 ‘가정교사’ >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에도 박정희는 자주 김학렬의 집을 방문, 동동주에
콩나물국을 안주삼은 단출한 주안상을 앞에 두고 밤새 경제에 대해 토론을
했다. 김씨의 부인 김옥남 여사는 “두 분이 하는 얘길 언뜻 언뜻 들으면 외자
도입이니, 투자니, 공장이니, 하는 소리 밖에 안 들려요. ‘무슨 수가 있어도
가난은 몰아내야 돼’,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내가 대통령을 그만둬도 그건
그칠 수 없어’라고 목소리 높여 말씀하시는데 어느 덧 날이 샜어요.”라고
말했다. 김학렬은 박정희의 ‘경제과외 교사’였던 셈이다.
혁명 이후 박정희가 대통령이 되면서부터 김학렬은 본격적으로 3공화국
경제의 주역으로 활약한다. 경제기획원 차관, 재무장관, 경제수석, 부총리 등 경제요직을 섭렵했으며 박정희는 그를 무척이나 신뢰했다. 그의 업적으로
꼽히는 것은 역시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과 <포항종합제철 건설>이다.
김학렬은 배짱과 소신으로 성장주도형 경제정책을 밀고 나갔고, 그 뒤에는
박정희라는 든든한 버팀목이 있었다.
< “해가 떠도 종합제철, 달이 떠도 종합제철” >
<포항종합제철>의 건설 책임자가 朴泰俊(박태준)이었다면 김학렬은 건설을
立案(입안)한 주인공이었다. 그는 제철소를 건설할 당시 부하직원들에게
“네놈들의 선조나 자손을 통틀어서 가장 보람있는 일을 하는 것이다. 네놈들 가문의 영광이니 다른 일은 일체 생각할 필요가 없다. 해가 떠도 종합제철,
달이 떠도 종합제철만 생각하다 일이 안되면 한강에 빠져 죽어라”하고 호통을 쳤다. 그 만큼 미친 듯이 포항제철 건설에 열을 올렸다. 그는 건설과정의 주역이었으나 준공식엔 끝내 참여하지 못하고 세상을 뜨고 만다.
< 險口毒舌(험구독설)과 奇行(기행) >
그는 險口毒舌(험구독설)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경상도 출신 특유의 입담으로 부하직원들에게 ‘무차별적’인 욕설을 내뱉었다. 결재를 맡고 나가려던 부하
직원이 엄청난 욕설을 들은 뒤 방문인 줄 알고 캐비닛 도어를 열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김학렬의 기행은 국제무대에까지 이어진다. 1966년 9월 재무장관 시절 東京(동경)에서 ADB(아시아개발은행) 창립총회가 열릴 때 김학렬은 재무부 대변인에게 “이봐, 자네도 알다시피 내가 일본에서 공부하다가 1944년에 김수환
추기경하고 같이 學兵(학병)에 끌려갔잖아. 이제 내가 한국의 재무장관이
됐으니 뭔가 보여주고 싶어. 한복을 입고 한민족의 얼을 과시하고 싶단
말이야.”
그는 중절모에 두루마기를 입고 하네다(羽田) 공항에 도착해 다음 날 회의
때도 한복을 입고 참석했다고 한다.
1972년 췌장암으로 세상을 뜨자, 박정희는 그의 빈소를 찾아와 “내가 당신을 죽였다. 술도 많이 먹이고 일도 많이 시키고...평생 나라를 위해 일만 하다
죽었다”며 대성통곡을 했다고 한다. 박정희에게 있어 ‘쓰루’ 김학렬은 조국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에 있어 평생 함께할 동지이자 스승이었던 셈이다.
< 경제 白紙 전두환, 김재익을 만나다. >
그에 비해 전두환은 경제에 대해 白紙(백지)일 정도로 사전지식이 거의
없었다. 사단장 시절 부대 운용비 정도를 관리하는게 그가 경험한 경제의 전부였다. 1980년 그가 대통령에 취임 했을 땐 경제상황의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1908년 1/4분기 도매 물가 상승률이 전년대비 37.7%나 치솟아
물가高(고)가 국민경제에 몰아 닥쳤으며, 과잉 중복 투자로 인한 通貨(통화)
과잉에 따른 인플레의 먹구름이 덮치고 있었다.
이런 시기에 집권한 전두환은 경제교사였던 朴鳳煥(박봉환) 경제과학심의위 상임위원(동력자원부 장관 역임. 2000년 작고)이 재무부 차관으로 나가면서
경제교사 한 명을 추천해 달라고 요청했고, 그때 추천받은 인물이 바로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스탠포드 대학 박사 출신인 金在益(김재익)前 청와대
경제수석(1938~1983)이었다. 김재익은 박사 학위 취득 후 귀국하여 한국은행 조사부를 거쳐 경제기획원에 몸 담으며 경제 자율화와 안정화에 눈을 뜨게
된다. 미국에 있을 당시 그는 天才(천재)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워낙 빼어난 이론과 지성을 갖췄을 뿐 아니라 겸손하기 그지없어 스웨덴이나 덴마크에선
그를 수출(?)하려고 시도한 적이 있었다. 그들은 김재익을 가리켜 ‘동방의
천재’라고 불렀다.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이 1980년 9월 11대 대통령에 취임하자 국보위
경제분과위원장이던 김재익은 경제수석으로 임명되었다.
김재익은 전두환에게 “경제수석으로서 각하를 모시는데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제가 드리는 조언대로 정책을 추진하시려면 엄청난 抵抗(저항)에
부딪힐 텐데, 그래도 끝까지 제 말을 들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여러 말 할 것 없어.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
전두환은 자신의 무지함을 알고 위임할 줄 아는 지도자였다.
< "살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다." >
김재익 경제는 의외로 간단했다. △ 경제 질서는 강제적인 힘이 아닌 수요와 공급에 이뤄져야 하고, △ 아무리 임금이 올라도 물가가 오르면 안 된다는 실물성, △ 가계와 정부가 적자운영을 해선 안 된다는 것이 요체였다.
그 중 인플레 억제는 김재익의 초미의 관심사였다. 전두환 정부 역시 물가안정을 경제정책의 최우선 방향으로 잡았다. 김재익은 돈이 가뭄에 목이 타듯이
절실히 필요할 때 시중의 통화를 줄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술을 끊어야 할 알콜중독 환자에게 최후의 한 잔의 술을 허락하는 것이 어떻게 慈悲(자비)냐는 것이 그의 논리였다. 그는 ‘살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다’는 각오로 은행민영화, 예산축소, 정부지출 삭감 등 획기적인 방향을 내놓았고 더 나아가 노동자의 임금억제, 추곡수매에 따른 정부의 가격보조정책 폐지 등 자칫 노동자와 농민들의
저항에 부딪칠 민감한 사안도 추진한다. 이 모든 정책의 歸結(귀결)점은 ‘재정축소를 통한 인플레 억제’ 그리고 ‘경제 안정화’였다.
< 돈을 줄여야 한다. >
김재익은 돈을 마구 찍어내는 정부정책에도 메스를 가했다. 한국은 1980년
29%나 되는 통화증가량을 보였는데 반해 일본은 9.2%, 서독은 8.4%를
보였으니 한국이 얼마나 무분별한 통화 팽창정책을 써왔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超(초)긴축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통화긴축은 자영업자 등 장사하는 사람들의 조직적인 저항에 부딪히기 마련이다. 당장 돈이 흐르지 않는데 그들의 불만이 어떠할 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김재익은 ‘수입자유화’등 개방화와 국제화에 대한 신념까지 있었다. 지금은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당시의 사회인식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수출을 해서 外貨(외화)를 많이 벌어도 시원찮을 판에 수입품 들여오는 것을
장려한다는 것은 국민 정서상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그는 수입
자유화를 해야 국내 산업에 경쟁력이 생긴다는 논리를 說破(설파)했다.
< “닥터 김은 ‘예리한 정치가’입니다.” >
안정화 정책이 하나 둘 씩 빛을 볼 때 그 역시 현실의 장벽에 부딪히고 만다. 바로 1982년 불거진 금융실명제 추진이었다. 1982년 7월3일 금융실명제 실시 계획은 ‘경제 안정 개혁파’였던 경제수석 김재익과 姜慶植(강경식)재무장관의 작품이었다. 당시 금융실명제는 모든 금융거래를 실명제를 실시하며 금융소득의 종합과세를 부과하고 3천만 원 이상 금융자산에 대해서는 과징금으로 5%를 내야 자금출처 조사 계획을 免除(면제)시켜 준다는 것이 골자였다.
그 해 5월 ‘이철희·장영자 어음 사기사건’이 전국을 뒤 흔들자 김재익은
전두환에게 지하경제의 숨은 검은 돈을 양지로 끌어올리고자 실명제 추진을
건의하게 된다. 그러나 기존의 기득권층으로부터 엄청난 반발을 사게 된다.
당시 권력층을 장악하고 있던 세력들은 실명제를 달가워하지 않았고 軍部
(군부)출신들을 중심으로 김재익을 향한 시기와 질투가 존재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실명제는 좌초하게 됐지만 김재익의 위상은 변하지 않았다. 한 파티석상에서 워커 주미 한국대사는 김재익의 부인 李淳子(이순자)(前 숙명여대 문헌정보학과 교수)씨에게,
“미세스 李는 당신의 남편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이코노미스트라고 해야겠지요.”
“천만의 말씀, 닥터 金은 결코 단순한 이코노미스트가 아닙니다. 그는 오히려 ‘예리한 정치가(shrewd politician)’라고 해야 할 겁니다.”
김재익은 경제개혁의지는 경제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닌 사회 전반에 관련된
것이었고 그는 특유의 부드러움과 논리, 겸손으로 밀고 나갔다.
< 人間 김재익… >
그는 늘 겸손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으며 맑은 성품을 지녔다고 주변 사람들은 전한다. 경제기획원에 근무할 당시 경비실 수위한테도 항상 친절했으며, 남에게 신세 지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함께 대학을 다녔던 宋復(송복)
연세대 명예교수는 그를 가리켜 ‘天眞無垢(천진무구)’하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83년 10월 전두환 대통령의 ‘서남아·대양주’ 첫 순방지였던 버마(현 미얀마)에서 북한이 저지른 테러에 의해 殉國(순국)하고 만다. 다른 어떤 이의 죽음보다 그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고, 哀惜(애석)해 했다. 그가 남긴 족적이 그 만큼 컸기 때문이다.
김재익이 세상을 뜬 지 몇년 후 ‘국제수지 사상 첫 黑子(흑자)’라는 신문기사를 보며 그의 부인 이순자씨는 밤새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철모르는 경제학자’라는 비아냥과 조소를 당하면서도 그가 꿈 꿨던 경제 안정화의 결실이 맺어
지자 말할 수 없는 슬픔이 다가온 것이다.
< 결 언 >
박정희와 전두환은 김학렬과 김재익이라는 인재를 쓸 줄 아는 탁월한 능력을 지녔고 두 경제 참모는 私心(사심) 없이 국가를 위해 헌신했다. 그들의 만남이 지금의 대한민국을 경제대국으로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는 사실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豊饒(풍요)의 시대를 享有(향유)하는 우리는 과거 이 조국을 위해 몸 바친 위대한 지도자와 훌륭한 관료가 있었다는 사실에 감사해 하고
고마워 할 줄 알아야 한다.
趙成豪(조갑제닷컴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