甲申譜(갑신보)(1464年. 1卷): 司憲府執義(사헌부집의) 李尹孫(이윤손)이 編纂(편찬) 했으며 冊(책)은 現在(현재) 傳(전)하지 않고 다만 그 序文(서문)만이 傳(전)해지고 있는데 韓國(한구) 崔古(최고)의 族譜序文(족보서문)이다.
癸丑譜(계축보)(1613年.1卷): 經筵參贊官(경연참찬관) 李稶(이욱)이 壬亂(임란
)뒤에 많은 探問(탐문)으로 흩어진 宗親(종친)들을 糾合(규합)하여 甲申譜(갑신보)를 增補(증보)한 것으로서 貴重(귀중)한 冊(책)이다.
丁卯譜(정묘보)(1687年.3卷): 中樞館修撰(중추관수찬) 李光迪(이광적)이 編纂(편찬)한것으로 後孫(후손) 李竣(이준)이 癸丑譜(계축보)를 矯正(교정)할 때에 甲申譜(갑신보)를 筆寫(필사)하여 간직한것을 보고 增修(증수)한 것이다.
辛未譜(신미보)(1751年.7卷): 大司諫李應協(이응협)이 辛酉(신유)(1741)年에 始作(시작)하여 10年만에 펴낸 活字本(활자본)이다. 이에 앞선 5券本(권본)이 있었다고 하나 未詳(미상)이다.
丁巳譜(정사보)(1797年.12卷): 靜窩(정와)李澤鎭(이택진)이 서울에 譜廳(보청
)을 두고 編纂(편찬) 하다가(어떤 問題(문제)가 있는 듯하다.)뒤에 書畵家(서화가)인 監役(감역) 李漢鎭(이한진)이 補完(보완)하여 刊行(간행)하였다.
庚寅譜(경인보)(1830年.21卷): 進士(진사) 李箕欽(이기흠),梧齋(오재),李春遇(이춘우)外(외) 3名(3명)이 修補(수보)한 것으로 當時(당시)로서는 大端(대단)한 힘을 기울인 作品(작품)으로서 全國(전국)을 거의 網羅(망라)한 巨譜(거보)이다,癸酉(계유)(1873)年에 參判(참판)李鍾律(이종률)이 續修(속수)할 뜻이 있었으나 이루지 못했다.
甲子譜(갑자보)(1924年.27卷): 宗孫(종손)의 還鄕(환향)으로 報本祠(보본사) 建立(건립)과 倂行(병행)된 文詞(문사)인데 世德篇(세덕편)에 安山書院(안산서원) 世進錄(세진록)과 報本祠實記(보본사실기)가 이때에 첫卷(首卷)에 收錄(수록)된 大同譜(대동보)로서 通常(통상) 甲子大譜(갑자대보)라고 한다.李祖赫(이조혁),李柄憘(이병희)가 主管(주관)하였는데 이때에 直接(직접)參與(참여)한 全國(전국)의 儒林(유림)과 宗親(종친)은 千名(천명)에 達(달)한 것으로 推定(추정)된다.
乙未譜(을미보)(1955年.5卷): 宗孫(종손)李鳳勳(이봉훈)公(공)이 主管(주관)하여 編纂(편찬)한 것으로 紙質(지질)이나 內容(내용)이 좋지않아 搬帙(반질)할때
非難(비란)이 많았으므로 所藏(소장)한 宗親(종친)이 많지 않다.
乙卯譜(을묘보)(1975年.9卷): 淸明熙(청명희) 李圭東公(이규동공)이 애썼으며 北韓居住(북한거주) 一族(일족)이 未篇(미편)된 印刷本(인쇄본)인데 國譯(국역)을 하지 않은것이 欠(흠)이라 하겠다.
壬戌派譜(임술파보)(1982年.2卷): 宗門(종문)密直公系(밀직공계) 처음으로 編纂(편찬)한 派譜(파보)로서 李源赫(이원혁), 李準鎔(이준용)이 主役(주역)으로 始作(시작)하여 李東玉(이동옥)의 私書(사서)로서 李敞杞(이창기)의 名義(명의
)로 46倍版(46배판)으로 發行(발행)한 韓文本(한문본)이며 [密直公派譜(밀직공파보)]라 題(제)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