姓氏의 故鄕

瑯야정씨(낭야정씨) (972).

아까돈보 2011. 6. 26. 22:49

 

 

鄭氏(낭야정씨)

 

▣ 由來

 

 

始祖(시조)  : 鄭先甲(정선갑)


始祖(시조)鄭先甲(정선갑)의 字(자)始仁(시인)으로 明(명)나라의 進士(진사)를 지냈으며 中國(중국)瑯琊(낭야)에서 出生(출생)했다.
鄭先甲(정선갑)은 明(명)나라 世宗(세종)文淵閣太學士(문연각태학사)를 지낸鄭文謙(정문겸)의 曾孫子(증손자)로 1617年 山東省(산동성)瑯琊(낭야)에서 出生(출생)하여進士(진사)로 있다가 1644年明()나라가淸()에 滅亡(멸망)되자
나라를 求(구)하려 義擧(의거)를 하려다가 淸軍(청군)에게 捕虜(포로)가 되어瀋陽(심양)에 끌려갔다.收容中(수용중)인 그 審陽(심양)에서馮三仕(풍삼사),黃功(황),王以文(왕이문)等(등)九義士(9의사)와 함께 同志(동지)로 結合(결합)하였는데, 이 때 丙子胡亂(병자호란)의 볼모로 審陽(심양)에 와 있던 鳳林大君[봉림대군.後(후)에 孝宗(효종)] 一行(일행)을 만나 함께 힘을 合(합)칠것을 約束(약속)하였다. 이듬해 鳳林大君(봉림대군)을 따라 朝鮮(조선)에 들어와 朝陽樓(조양루)南(남) 皇朝人村[황조인촌:只今(지금)의 鍾路區(종로구)蓮池洞(연지동)1番地(1번지)附近(부근)]에 살면서 孝宗[효종:鳳林大君(봉림대군)]과 秘密裏(비밀리)에 北伐(북벌)할 計劃(계획)을  推進中(추진중)1659年(孝宗10年)(왕)의 急逝(급서)로 北伐計劃(북벌계획) 挫折(좌절)되고 그리던 故國(고국)에 돌아가지 못하게되자 朝鮮(조선)에 歸化(귀화)하여 살게 되었다고 한다.그後(후)後孫(후손)들은 150餘年間(150여년간)皇朝人村(황조인촌)에 集團居住(집단거주)하면서  朝廷(조정)에서 베푸는 北伐(북벌)[特別(특별)厚待(후대)]를 받아왔고,壬辰倭亂(임진왜란) 援軍(원군)을 보내준 (명)나라 神宗(신종)의 恩義(은의)를 追慕(추모)하기 爲(위) 肅宗(숙종)이 秘苑(비원)내에大報壇(대보단)을 만들어,配享(배향)할때 始祖(시조)鄭先甲(정선갑)을 包含(포함) 九義士(구의사)를 함께 配享(배향)하는 恩典(은전)이내렸고,大報壇(대보단)守直官職(수직관직)을 9義士(9의사)子孫(자손)에게 代(대)를 물리도록 하였다.

後孫(후손)들이始祖(시조)의 出身地(출신지)를 따라 本貫(본관) 瑯琊(낭야)로 하였다.

 

▣ 世居地

 

  京畿道 抱川郡 抱川 雪雲里
京畿道 議政府市 龍峴洞

 

▣ 本貫沿革

 

 

本貫所在地 : 中國(중국) 山東省(산동성)


瑯琊(낭야)는 中國(중국) 山東省(산동성) 淸州府(청주부) 諸城縣(제성현) 近方(근방)에 位置(위치)하는 地名(지명)이다.漢(한)나라 때부터 華麗(화려)한 王道政治(왕도정치)의 中心地(중심지)로 有名(유명)하였다.

 

▣ 人口數

 

 

統計廳(통계청)의 人口調査(인구조사)에 依(의)하면 瑯琊鄭氏(낭야정씨)는
1985年에는 摠 194家口 871名,
2000年에는 摠 335家口 1,088名이 있는 것으로 調査(조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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