武科(무과)에 及弟(급제)하여 禦侮將軍(어모장군)으로 宣傳官(선전관)을 歷任(역임)했던 耕疇(경주):(左尹相의아들)와 戶曹正郞(호조정랑)을 지낸 泰疇(태주)兄弟(형제)가 有名(유명)했으며, 察訪(찰방)禧(희)의 아들 居珠(거주)와 自珠(자주)는 寧越郡守(영월군수)와 利原縣監(이원현감)을 各各(각각)歷任(역임)하여 家勢(가세)를 일으켰다. 其外(그외)通訓大夫(통훈대부)로 繕工監役(선공감역)을 지낸 長疇(장주)와 廣州府尹(광주부윤) 贊銘(찬명),同知中樞府事(동지중추부사) 順銘(순명), 軍資監正(군자감정)仁銘(인명),漆院縣監(칠원 현감)慶弼(경필),刑曹參議(형조참의)宇烈(우열)等(등)이 뛰어났으며,訓鍊院判官(훈련원판관)을 지냈던 海(해)는 漢城府左尹(한성부좌윤) 錄(록),禮曹參判(예조참판) 龍瑞(용서), 同知中樞府事(동지중추부사) 仁雲(인운)等(등)과 함께 家統(가통)을 이었다.純祖(순조)때 와서는 이름난 詩人(시인)으로 庶民文壇(서민문단)의 모제를 이루었던 壽慶(수경)이漢陽(한양)玉流泉(옥류천)近處(근처)의 松石(송석)틈에 草堂(초당)을 짓고 스스로 松石道人(송석도인)이라 하며 松石園詩社(송석원시사)>를 열어 八道(팔도)의 詩客(시객)들과 함께詩(시)를 읊으며 一生(일생)을 살았다.當時(당시)詩人(시인)으로서 이곳에 參與(참여)하지 못한 사람은 羞恥(수치)로 여길 만큼 名望(명망)을 떨쳤던 壽慶(수경)은 뛰어난 詩文(시문)外(외)에도 奇人(기인)다운 面(면)으로 이름났다. 壽慶(수경)은 膝下(슬하)에 아들 5兄弟(형제)를 두었는데,이름을 一松(일송)·,二石(이석)·三足(삼족)·四過(사과)·五何(오하)로 지었다.一松(일송)과 二石(이석)은 自身(자신)의 雅號(아호)인 松石園(송석원)에서 따고, 셋째 아들 三足(삼족)은 아들이 셋이니 그만하면 足(족)하다는 뜻이고, 넷째 四過(사과)는 아들이 넷이면 너무過(과)하다는 뜻이며,五何(오하)는 또 아들을 낳았으니 어찌하면 좋겠느냐는 뜻이라고 한다.그밖에 緯永(위영)과 厚根(후근)·夏永(하영)等(등)이 學者(학자)로 이름을 떨쳤으며,世憲(세헌)은 高宗(고종)때外部主事(외부주사)를 歷任(역임)한 後(후)渡美(도미)하여 安昌浩(안창호)와 함께 獨立運動(독립운동)을 벌이고 上海臨政(상해임정)에 參與(참여)했으며, 世光(세광)은 解放(해방)後(후)에 聖潔(성결)서울神學校(신학교)를 創設(창설)하여 理事(이사)가 되고 十字軍(십자군)傳道大將(전도대장)으로 傳道事業(전도사업)에 功獻(공헌)하여 潁陽千氏(영양천씨)를 더욱 빛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