姓氏의 故鄕

鶴城李氏(학성이씨) (1095).

아까돈보 2011. 9. 14. 16:57

 

 

鶴城李氏(학성이씨)

 

▣ 由 來

 

 

始 祖(시 조)  : 李 藝(이 예)


始祖(시조)李藝(이예)는 高麗末(고려말)에 새王朝가 들어서자 不事二君(불사이군)의 忠節(충절)을 지켜 落鄕(낙향), 只今(지금)의 蔚山(울산)에 터를 잡아 自身(자신)의 身分(신분)을 감추고 지냈다. 그러나 20餘年(여년)이 지나 世宗(세종)이 王位(왕위)에 오르면서 그는 生覺(생각)을고쳤다. 當時(당시)蔚山(울산)은 倭寇(왜구)의 侵入(침입)을 자주받아 民心(민심)이 凶凶(횽흉)하고 百姓(백성)들의 괴로움이컸다.이웃의 괴로움을 덜고자 通信使(통신사)로 나선 그는 倭(왜)와의 40餘次例(40여차례)에 걸친 往來外交(왕래외교)에서 猛活躍(맹활략)했다. 그功(공)으로 世宗(세종)3年(3년)朝廷(조정)으로부터 忠肅公(충숙공)의 諡號(시호)와 함께 功佩(공패)를 下賜(하사)받았다.그는 또한 武器開發(무기개발)에도 業積(업적)을남긴 發明家(발명가)였으나 그는 벼슬보다 선비로서 조용히 살것을 後孫(후손)들에게 遺言(유언)했다.
 

▣ 人物

 

 

朝鮮時代(조선시대)에 壬辰倭亂(임진왜란)때 6義士(6의사)를 輩出(배출)해 忠義(충의)의 家門(가문)으로 더욱 빛난다.
李景淵(이경연)은 壬辰倭亂(임진왜란)이 나자 故鄕(고향)에서 義兵(의병)을 일으켰고 丁酉再亂(정유재란)때는 郭再祐(곽재우)와 함께 慶南昌寧(경남창녕)의 火旺山城(화왕산성)戰鬪(전투)에 參加(참가) 큰功(공)을 세워 鏡城判官(경성판관)에 任命(임명)되었다.
李仁常(이인상)亦是(역시)鄕里(향리)에서 義兵(의병)을 일으켜 數(수)많은 戰鬪(전투)에서 倭敵(왜적)과 奮戰(분전)하여 功(공)을 세우고 刀山(도산)싸움에서 壯烈(장열)히 戰死(전사)했으며,
李謙受(이겸수),李謙益(이겸익)兄第(형제)는 當時(당시)西生浦(서생포)에 駐屯(주둔)하고 있던 倭軍(왜군)의 情勢探偵(정세탐정)에 큰功(공)을 거두어 李謙受(이겸수)는 定州判官(정주판관)을 除授(제수)받았고 李謙益(이겸익)은 顯宗(현종)때 漢城府(한성부)右尹(우윤)을 지냈다.
李鳳壽(이봉수)는 빛나는 戰功(전공)을 세우고 鎭中(진중)에서 殉國(순국)하여 宣武功臣(선무공신) 1等(1등)으로 祿封(녹봉)되었다.

朝鮮顯宗(조선현종)때의 大文章家(대문장가)李東英(이동영)은 國亂(국란)에 戰功(전공)을 세워 官職(관직)을 받고도 이를 辭讓(사양)하고,草野(초야)에 묻혀自然(자연)과 함께 노닐었던 할아버지 李翰南(이한남)의 뜻을 기려 顯宗3年(현종3년)봄 太和江邊(태화강변)에 二休亭(이휴정)을 지었다.
鶴城李氏(학성이씨)는 以外(이외)에도 李養吾(이양오),李觀吾(이관오)兄第(형제)와 李俊民(이준민)같은 文章家(문장가)들을 輩出(배출)하여家門(가문)의名聲(명성)을 이어왔다.

 

▣ 科擧及第者(朝鮮時代)

 

 

李俊民(이준민) (1736 丙辰生) : 司馬試 英祖47年(1771) 式年試 三等
모두 1名의 科擧 及第者가 있다.
(司馬試 1名)

▣ 世居地

 

 

慶南 蔚山市 新亭洞.


始祖(시조)의 8代孫(8대손)李翰南(이한남)이 太和江(태화강)을 건너와 新亭洞(신정동)에 살기始作(시작)한것이 契機(계기)가 돼 孫子(손자)李東英(이동영)이 亭子(정자)를 지어 二美亭(이미정)이라했다.물좋고 산좋기가 中國(중국)金陵(금릉)黃江樓(황강루)에 比(비)할만하다고 해서 이름을 붙였으나 그곳을 지나던 暗行御使(암행어사) 朴世衍(박세연)이"너그러운 마음으로 悠悠自適(유유자적)하고 世上(세상)의 功名(공명)을 求(구)하지 말고 山(산)에 쉬고 물에 쉬는것이 좋겠다"고 해서 二休亭(이휴정)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本貫 沿革

 

 

本貫所在地 : 蔚山廣域市


鶴城(학성)은 慶尙南道(경상남도)東海岸(동해안)에 位置(위치) 蔚山(울산)의 옛 이름으로 本來(본래) 辰韓(진한)의 땅이었으며,三國時代(삼국시대)에는 新羅(신라) 屈阿火村(굴아화촌)으로 婆娑王(파사왕)때에 知邊縣(지변현:

戒邊城·神鶴城·火城郡)을 設置하였다.757年(新羅 景德王16)에 河曲縣(하곡현)으로 고쳐 臨關郡(임관군)의 領縣(영현)을 삼았다. 高麗太祖(고려태조)때 이 고장 사람인 朴允雄(박윤웅)이 太祖(태조)를 도운 功(공)으로 虞風縣(우풍현)과 東津縣(동진현)을 倂合(병합) 興麗府(흥려부)로 昇格(승격)되었다가,991年(成宗10)에 恭化縣(공화현)으로 降等(강등)되었다. 1018年(顯9)에 蔚州郡(울주군)이되어 屬縣(속현)으로 東萊縣(동래현)과 峴陽縣(현양현)을 管轄(관할)하였다가 防禦使(방어사)로 고쳤다.  1397年(太祖6)에 (진)을 두었으며 1413年(太宗13)에 鎭(진)을 革破(혁파)하고 蔚山郡(울산군)으로 고쳤다.1418年에는 鹽浦(염포)를 開港(개항)해 日本(일본)에 對(대)한 門戶(문호)열었으나, 1510年(中宗 5)三浦倭亂(삼포왜란)으로 倭館(왜관)이 廢止(폐지)되었다. 壬辰倭亂中(임진왜란중)인 1598年(宣祖31)에 蔚山都護府(울산도호부)로 昇格(승격)되어 兵馬節度使(병마절도사)가 府使(부사)를 兼(겸)하게 되다가 1616年(光海君 8)에 다시 別途(별도)로 府使(부사)를 派遣(파견)하였다.1895年(高宗32)地方制度改正(지방제도개정)으로 東來府(동래부)蔚山郡(울산군)이 되었고,1896年에 慶尙南道(경상남도) 蔚山郡(울산군)이 되었다.高麗成宗(고려성종)때, 蔚山(울산)의 別稱(별칭) 鶴城(학성)이라고 하였다. 1906年에는 越境地整理(월경지정리)에 依(의) 斗入地(두입지)인 外南面(외남면)·熊上面(웅상면)이梁山郡(양산군)으로 移管(이관)된 代身(대신)慶州(경주)의 斗入地(두입지)인 外南面(외남면)이編入(편입)되었다.1914年 郡面廢合(군면폐합)으로 蔚山郡(울산군)의 21個面(21개면)이 14個面(14개면)으로 統合(통합)되었고,彦陽郡(언양군)은 廢止(폐지)되어 彦陽郡(언양군)의 6個面(6개면)이 5個面(5개면)으로 廢合(폐합),蔚山郡(울산군)에 編入(편입)되었다. 1962年 經濟開發(경제개발)5個年(5개년)計劃(계획)에 依(의)해 蔚山邑(울산읍)을 市(시)로 昇格(승격)하였다.1995年에 蔚山市(울산시)와 蔚山郡(울산군)을 統合(통합)하고, 1997年 蔚山廣域市(울산광역시)로 出帆(출범)하였다.
 

▣ 人口數

 

 

統計廳(통계청)의 人口調査(인구조사)에 依(의)하면 鶴城李氏(학성이씨)
1985年에는 摠 4,625家口 18,869名,
2000年에는 摠 6,615家口 20,964名이 있는 것으로 調査(조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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