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보훈의 달, 중국에서 안중근 의사를 만나다
김 길 홍 (안동사랑운동본부 이사장․ 제13,14대 국회의원)
여행을 하다보면 자칫 여기 저기 거쳐 지나가는 주마간산(走馬看山)의 경우는 아주 흔한 일이다. 문화와 풍속이 다른 나라를 애행할 때는 더욱 그러하기 십상이다. 기억에 남지 않는 주마간산의 여행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항상 방문의 주제와 목적이 뚜렷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여행 목적이 분명하면 추억과 의미도 오래 간직하게된다.
대한민국 헌정회 일원으로 이번에 중국의 동북 3성을 여행한 것이 바로 그렇다. 헌정회 제3차 방문단의 일정은 조국의 국권회복과 독립을 위해 항일투쟁을 벌였던 선조들이 신산(辛酸)의 세월을 보냈던 풍찬노숙(風餐露宿)의 만주 현장을 찾는 것이 목적이었다. 특히 안중근 의사의 유적지를 돌아보는 것은 이번 여행의 핵심중의 하나였다. 여행길에 오른 때는 마침 호국보훈의 달 6월, 조국광복과 국토방위를 위해 산화한 선열의 얼을 기리는 현충의 달이 아닌가. 여행의 의미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중국으로 떠나던 6월 26일 오전, 인천 공항 출국장에서 3박4일 동안 함께 할 방문단원들이 오랜만에 정겨운 인사를 나누었다. 부지런하기로 소문 난 권해옥 헌정회 사무총장이 일부러 공항까지 배웅을 나와 일행을 기쁘게 해줬다. 31명의 헌정회원을 인솔할 단장으로 추대된 신상식 의원은 훌륭한 인품과 덕망이 높다는 주변의 평가에 걸맞게 동행할 단원들을 하나하나 친절하고 반갑게 맞이했다. 우리들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수행한 헌정회 사무처 양면승 과장도 바쁘게 움직였다. 일행 가운데 2008년 중국 황산을 같이 갔던 변우량(회장),정병학,송두호,정호용,천용택,김의재,김정부(총무)의원등 황인회 멤버도 다수 동행해서 기뻤다. 참가한 회원 대부분은 백발이 성성한 원로들, 세월의 흐름이 무상함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러는 지팡이에 의지한 회원도 있었지만 80대의 정정하신 다섯분도 여로에 동반하셨다.
가뭄으로 농민들의 속이 타들어가고 제19대 국회가 개원되지 않아 정국이 불안한데다 헌정회의 연로지원금 지속여부가 시비의 대상이 되고 있는 시기여서 단원들의 마음이 결코 가벼운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안중근 의사의 유적지를 중점적으로 돌아보는 여행에 대한 기대가 컸던 탓에 출국장의 화제는 풍성했다. 바로 하루 전이 6.25전쟁 62주년을 맞는 날이었던 탓에 방문단 멤버 중 참전용사가 화제에 올랐다. 포천전투에 육사생도로 참전한 양창식 의원,소대장으로 참여한 박익주, 당시 사병으로 참전한 정호용의원,유엔군 통역관으로 참전한 최고령의 정병학 의원등은 처절했던 당시를 회상하면서 후세대가 투철한 애국심으로 조국을 튼튼하게 지켜주기를 소망했다.
입국수속을 마치고 오른 아시아나 비행기 기내에서 멀리 내려다보이는 드넓은 한강과 서해는 6월의 아침 햇살을 받아 유난히도 반짝이고 아름다웠다. 첫 행선지는 중국 동북지역 항구도시 다렌 이었다. 한 시간 남짓 지나 중국 땅 다렌에 도착한 다음 곧바로 버스를 타고 안 의사가 투옥과 재판을 거쳐 교수형이 집행돼 순국하기 까지 마지막 144일 보냈던 뤼순의 형무소와 관동법원으로 향했다. 중국 당국이 관광용으로 보존하고 있는 듯 뤼순 감옥은 일제시대의 형무소 모습 그대로였다. 안 의사가 갇혔던 한 평 남짓한 독방이 있는가 하면 5〜6명을 수용하는 좀 더 큰 방도 있었다. 형무소 한쪽 끝에 자리 잡은 교수형 집행실도 보여 주었으나 안중근 의사의 형 집행실은 별도의 장소에 보존되어 있었다. 안 의사는 2층 규모가 좀 넓은 고등법원 법정에서 재판을 받았다. 일제는 1909년 10월 26일 안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격살이 세계사적 사건으로 이목을 끌자 국제여론이 두려워 많은 사람들이 방청할 수 있는 이 고등법원을 사용했다고 한다. 안 의사가 1910년 3월 26일 순국한 5평 남짓한 교수형 집행실에서 일행은 경건한 묵념을 올리며 한동안 추모의 시간을 가졌다. 교수형 의자, 휑하니 아래로 뚫린 마루바닥, 형 집행 전 대기하던 방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그 옆엔 안 의사의 흉상이 모셔져 있었고 화환과 꽃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흉상 주변의 벽에는 안 의사가 옥중에서 쓴 우국충정의 유묵(遺墨)들이 100여 점 전시되어 있었다. 한 획 한 획이 피를 토하는 듯 애국의 열정과 조국독립의 한이 서려있는 듯 느껴졌다.
안 의사 동상 옆에는 이곳에 한때 투옥됐던 신채호, 이회영 선생의 흉상도 나란히 자리 잡고 있어 참배의 기회를 가졌다. 중국 당국은 가까운 별도의 장소에 중․일 전쟁 당시 이곳에 잡혀왔던 중국 공산당 독립운동가의 사진과 유물도 전시하고 있었다. 중국이 뤼순 감옥을 잘 보존하고 있는 것은 일본과의 항일투쟁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역사적 당위성도 한 몫을 한 듯 했다. 중국지도자 주은래수상이 안 의사의 의거에 대해 “중․일 갑오전쟁 이후 중국 인민이 일제 침략을 반대하는 투쟁은 안중근이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것으로 부터 시작했다”고 또 다른 의미를 부여했다.
안 의사의 순국현장에서 우리는 아직도 안 의사의 유지를 받들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안 의사는 “내가 죽은 다음 나의 유골을 하얼빈 공원 옆에 묻었다가 우리나라가 주권을 회복한 뒤 조국에 이장하기 바란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나라의 독립을 위해 노력할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일제는 안 의사의 형을 집행한 뒤 사람 키보다 작은 나무통에 시신을 구겨넣어 형무소 주변에 묻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아직도 안 의사의 유해는 찾지 못하고 있다. 서울 효창공원에 마련한 안 의사 묘소는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허묘(虛墓)에 불과하다. 이 얼마나 안타깝고 원통한 일인가.
우리는 뤼순감옥에서 짧지만 비장한 인생을 마감한 안 의사의 조국사랑과 거인의 면모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거인의 위대함은 순국의 현장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안 의사는 순국 직전까지 동북아의 평화를 위해 ‘동양평화론’을 집필했던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미완의 이 글에서 안 의사는 근대 동아시아 지역의 평화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제시하고 궁극적으로는 인류평화를 지향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안 의사는 실천방안으로 청․일․한 3국이 공동주체가 되어 독립․평등․공존을 기본으로 삼는 다국적 지역공동체를 구성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1세기 전 이미 미래의 동북아 정세를 진단하고 해법을 제시한 혜안과 선견지명이 놀랍기만 하다. 안 의사의 사상과 주장에는 인류사회가 지향해야 하는 자유․평등․공존의 보편적 가치가 포함되어 시간이 지날수록 안목이 높게 평가될 것으로 보인다.
안 의사가 짧은 인생을 마친 뤼순 감옥을 뒤로한 일행은 버스로 5시간 걸리는 북․중의 최단거리 국경인 단둥을 향했다. 버스 안에서의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자기소개를 겸한 친목의 시간을 가졌다. 신상식 단장은 제일 먼저 이번 역사탐방 코스는 헌정회가 새로 개척한 것이라면서 건강하고 즐거우며 추억에 남는 여행이 되기를 바란다는 인사를 했다. 김석준 간사의 사회로 회원 한사람씩 버스좌석 앞으로 나와 방문소감과 간단한 덕담을 나누었다. 헌정회의 직전 사무총장을 지낸 이윤수 의원이 요즘 시비가 되고 있는 연로지원금 존속의 타당성을 설득력 있게 조목조목 설명하자 모두들 감명을 받은 표정이었다.
늦은 저녁나절 어둠이 짙게 깔릴 때 단둥에 도착했다. 버스 차창으로 보이는 북한 쪽 강변은 희미한 전등이 띄엄띄엄 몇 개 보이는 적막강산인데 비해 중국 쪽 단둥은 휘황찬란한 건물에 네온사인이 화려하게 빛을 발해 대조적이었다. 단둥은 10여 년 만에 한가한 농촌에서 고층빌딩이 즐비하고 자동차들이 질주하는 공업, 무역 도시로 상전벽해(桑田碧海)의 개벽을 했지만 바로 2〜3백 미터 거리의 북한 쪽은 옛날 그대로라고 안내원이 얘기했다. 내일 밝은 날에 북한 쪽을 보기로 하고 압록강 변 중국 강변에 자리한 크라운 호텔에 여장을 풀고 첫 밤을 보냈다.
27일 새벽 5시 일찍 눈을 떴다. 60년대 중반 함께 정치부기자로 국회를 취재했던 신경식 의원과 룸메이트가 되어 이른아침 같이 압록강 하류의 강변을 1시간동안 산책했다. 중국의 단둥과 북한의 신의주 사이를 흐르는 강폭은 2〜3백 미터에 불과했다. 사람과 건물과 나무가 손에 잡힐 듯했다. 단둥이 신흥공업도시인 탓에 강 주변은 오수로 지저분했다. 오물 냄새가 풍기는 것을 참으며 강 건너 북한 쪽을 살피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50년 대 우리가 보았던 낡은 건물이 띄엄띄엄 보일 뿐 인기척도 없고 고요했다. 죽음의 마을이라면 너무 심한 표현일까.
호텔에서 아침식사를 마치고 압록강의 신의주, 위화도, 월량도를 유람선으로 돌아보는 일정을 시작했다. 새벽 산책 때와 달리 남루한 차림의 인부가 군데군데 보였다. 강변에는 낡은 경비정이 한 두 척 정박해 있었으나 군인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 공장도 몇 개 보였으나 최근 전혀 가동되지 않은 듯 쓰레기만 쌓여 있었다. 중국 단둥과 북한 신의주 양안을 비교해 보면 번영과 빈곤, 활력과 정적이 교차했다. 북쪽은 빛과 기운을 잃은 동토의 땅 같았다.
허물어져가는 낡은 공장 벽에는“위대한 김일성 동지와 김정일 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선군 조선의 태양 김정은 장군 만세”라는 선전문구가 중국단둥 쪽을 향해 을씨년스럽게 붙어 있었다. 헐벗고 굶주린 북한 동포들이 남 보지 않는 곳에서도 그렇게 생각할까 하고 생각이 미치자 안쓰러운 마음이 지나갔다.북한이 압록강 중간에 자리 잡은 위화도와 황금평을 경제특구로 개발한다고 수년전부터 별렀지만 아직 아무런 진척이 없다는 안내원의 설명을 듣고 보니 북한도 사정이 매우 어려운 것 같았다. 40여분 동안 유람선을 타고 북한 국경을 최단거리에서 바라본 느낌은 답답함과 우울함 그 자체였다. 하루빨리 남북통일을 이루어 북한 동포들도 발전과 번영과 자유와 평화의 혜택을 누렸으면 하는 소망이 간절했다.
3대의 독재세습과 인권유린으로 반세기를 지탱해온 북한, 정권은 존재하되 국민을 무시하는 땅, 국가이기 보다는 왕조이기를 바라는 나라, 주민에게는 희생을 강요하고 집권층은 선택된 제후이기를 바라는 나라, 지구촌의 일원이기를 거부하는 대신 불가능한 독자생존의 길을 걸어가는 어리석은 나라, 인류가 공유하고 있는 자유와 평등의 이념을 거부하고 부자유와 불평등을 최고의 가치로 삼고 있는 나라. 북한이 추구하는 탈지구적(脫地球的) 체제유지의 유산이 지금 북한의 모습이며 현실이다. 생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간적인 삶을 위해 공산주의 동토(凍土)를 탈출하는 주민이 갈수록 증가하는 것은 북한이 자유의 대열에 합류해야 한다는 여러 가지 신호 중의 하나이다. 이제 북한은 변해야 한다. 번영과 활력이 없는 곳에 자유와 번영과 인권의 씨앗은 자라지 않는다.
다음 일정은 동북공정(東北工程)이라는 이름으로 역사를 멋대로 왜곡하는 중국의 현장을 확인하는 아주 유쾌하지 못한 코스였다. 그곳도 중국과 북한이 폭 10여 미터의 시냇물이 경계를 이루는 국경지대였다. 중국이 만리장성의 동단 기점이라고 우기고 있는 호산장성(虎山長城)의 공사 현장에 도착했다. 이곳을 국립공원과 같은 관광단지로 조성하기 위해 토목, 건축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북한과 맞닿은 산꼭대기에서 평지에 이르기까지 만리장성과 같은 구도와 모습의 성곽이 이미 축조를 끝낸 상태였다. 성곽 끝에는 기와집 모양의 커다란 망루까지 지어놓았다. 우리의 조상들이 발해와 고구려를 세워 그 옛날 만주의 동북 3성(요령성 길림성 흑룡강성)을 차지하고 지배했던 엄연한 우리 땅이었지만 이곳의 역사를 조작하여 만리장성의 동쪽 기점이라고 우겨대는 중국의 주장에 어이가 없었다. 일행 모두는 이곳 호산장성과 북한 사이 폭 10 여 미터의 냇물 하나 사이에 두고 있는 이곳을 둘러보고 울분을 금치 못했다.
민족의 영산 백두산의 반을 중국에 넘겨주고 또한 만주의 동북 3성을 우리 땅이라고 당당하게 주장하지 못하는 김일성, 김정일 등 북한 당국의 민족 자존심을 포기한 처사를 생각하면 분노가 치솟을 뿐이다. 이곳 옛 성터는 중국의 사학자도 고구려성이라고 밝힌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을 자기네 속국으로 만들어 버리려는 패권주의의 현장이자 증거였다. 강도 산도 들도 물도 나무도 사람도 모두 우리네 것과 똑 같은데도 우리의 옛 강토 고구려와 발해의 땅을 지키지 못한 회한이 가슴을 쳤다.
중국의 문호 린위탕(林語堂)은 중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의 키워드가 필요하다고 했다. 문자, 만리장성, 체면(面子)가 그것이다. 1716년 완간된 강희자전(康熙字典)에 수록된 한자는 47,035자였다. 중국에서 세 가지 불가능한 것 가운데 하나가 문자를 다 알 수 없다는 말은 그래서 생겨났다. 국토는 한반도의 44배, 동서 길이 5,200km 남북 길이 5,500km, 14개국과 접한 국경은 2,280km이다. 중국은 중화(中華)를 근본으로 삼고 四戎(사융)(東夷, 西戎, 南蠻, 北狄)을 거느린 대국사상을 고수해 온 나라다. 만리장성은 북쪽 오랑캐(北狄)의 침입을 막기 위해 축성했다. 청․일 전쟁 이후 세계경영의 주도권을 서양에 빼앗겼던 중국은 20세기 후반 경쟁적 기술개발과 빠른 경제성장으로 미국과 함께 이른바 세계 2강의 지위를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중국은 경제뿐만 아니라 문화와 문명을 그들의 방식으로 재해석하기 시작했다. 동북공정은 이 가운데 하나이다. 변방의 국가들이 뭐라고 하건 말건 그들은 중화의 방식대로 역사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남북한이 통일국가를 이루고 경제발전을 이룩했다면 그들은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우리에게 동북공정을 밀어붙일 수 있었을 것인가. 북한은 지금이라고 통일의 길목으로 나서야 한다.
호산장성에서 다음 행선지인 심양으로 출발했다. 동북 3성 여행코스는 보통 하루 4〜5시간 버스로 이동해야 하는데 일행의 대부분이 나이가 많은 분들이라 지루하고 힘들었다. 오후 늦게 심양에 도착해 보니 교통체증이 심하고 도심은 무질서하며 혼란스러웠다. 몇 번 방문해 봤지만 중국은 국토의 규모와 인구및 생산성 등 외형상으로는 경제대국이 틀림없으나 질서와 생활 등 의식 수준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아직은 선진국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렉싱턴 호텔에서 이틀째 밤을 보내고 28일 아침 마지막 코스인 하얼빈으로 가기 위해 특급열차에 올랐다. 심양역은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머리에 짐을 이고 어깨에 보따리를 진 수많은 인파가 떼를 지어 무질서하게 몰려들었다. 마치 1950년대 우리들이 피난 가는 열차에 밀치고 헤치며 오르는 광경을 연상하게 했다. 새 역사를 신축, 수리중이어서 1킬로 정도 걸어 새마을호와 비슷한 수준의 기차를 탔다. 여행시간은 4시간 반 정도, 달리는 열차 양쪽 차창 밖으로 지평선 끝까지 펼쳐진 광활한 만주벌판의 옥수수 밭이 눈에 들어왔다. 만주 벌판의 푸른 옥수수 밭을 보며 비를 기다리는 한국의 농민들을 생각했다. 그 옛날 광복과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선조들이 이 황량한 만주벌판에서 풍찬노숙하는 간난의 세월을 견디며 조국의 독립과 애국애족의 열정을 불태우던 고통과 각고의 설움을 생각하니 가슴이 저려왔다. 기차는 지루하게 달렸으나 중국 사정에 밝은 홍희표 의원이 동북 3성의 역사를 설명해 준데다 장영철,김정부의원의 익살과 젊은 축에 드는 곽성문, 박상희 의원 등의 잔심부름과 재미있는 얘기는 그만큼 지루함을 덜게 했다.
점심나절 러시아 냄새가 물씬 풍기는 흑룡강변에 위치한 하얼빈에 도착했다. 이곳은 1800년대부터 러시아 사람들이 많이 살았고 역사가 오래된 도시여서 그런지 도시의 배치와 질서는 단둥이나 심양에 비해 비교적 짜임새가 돋보였다. 우리는 민족의 영웅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사 플랫폼에서 한국침탈을 주도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역사적인 현장에 섰다. 한국독립의 당위성을 세계만방에 알린 감격의 격살현장은 플랫폼 바닥에 조그맣게 표시되어 있었다. 그곳이 우리 땅이었으면 벌써 성역화 되었을 역사, 그 곳을 무심한 타국의 승객들만 떼 지어 오가고 있어 안타까웠다.
늦은 점심을 먹고 하얼빈 시내에 있는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찾았다. 기념관은 우리 동포들이 성금을 모아 7층 규모의 건물을 매입한 조선민족예술관 2층에 마련되어 있었다. 안 의사의 일대기를 사진과 기록으로 잘 정리한 전시물을 관람하면서 이국땅에서 후손들에게 민족혼을 되살려서 조국을 기억하게 하는 우리 동포들의 조국애를 읽는 것 같아 가슴이 뜨거워졌다.
하얼빈에 살고 있는 우리 동포는 12만 명 정도라고 한다. 독립투사 1세대들은 자신들이 죽으면 시신을 이 땅에 묻는 것이 아니라 화장하여 송화강에 뿌려 그 재가 흑룡강과 러시아를 거쳐 동해로 흘러 조국에 다다르기를 원했다고 한다. 꿈에도 잊지 못하는 조국을 향한 독립투사들의 애국심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기념관 별실에서 현지 동포들이 제작한 이토 사살 장면, 체포 순간, 조사 장면, 유필묵, 교수형 직전 모습 등을 담은 안 의사의 일대기 동영상을 관람했다. 이어 안 의사 동상 앞에서 일행은 엄숙하게 묵념을 올리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신상식 단장은 기념관에 성금을 전달하고 방명록에 “안중근 의사 만세!”라고 서명했다.
하얼빈 안 의사 기념관 방문을 끝으로 헌정회 역사탐방의 공식 일정을 무사히 마친 일행은 공항을 떠나 29일 오후 6시 인천공항으로 모두 건강하게 귀국했다.
어떤 여행이든 일정, 동반자, 잠자리, 식사 등이 잘 맞아야 오래 기억에 남는다. 대체로 연로한 분들이 많이 참여해 장시간 승차, 도보 관람 코스, 현지식 식사 등에 불편함이 적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했었지만 사고나 해프닝 없이 시간도 잘 지키시고 협조해 주셔서 고마운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 현지의 시내관광 코스는 간혹 생략하기도 했지만 안 의사 유적지 탐방과 북․중 국경지대 시찰, 중국의 역사왜곡 현장 답사 등은 예정대로 완전히 소화했다. 나라에 헌신 봉사한 원로 정치인답게 우리들은 호국보훈의 애국심과 민족자존의 정신을 오늘에 되살려 고구려, 발해가 다스렸던 동북 3성의 옛 우리 국토를 새롭게 되돌아보는 헌정회 역사탐방의 원래 목적에 충실했다고 자부한다.
역사탐방을 기록하는 필자의 입장에서, 이번 여행은 개인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었다. 1910년부터 1914년 사이 나의 조부(金秉大)께서는 고향인 경북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내앞 마을(의성김씨 집성촌)의 집안 어른이신 백하 김대락, 일송 김동삼 선생과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내신 안동 탑골의 석주 이상룡 선생 등과 함께 식솔들을 거느리고 안동을 떠나 만주로 함께 망명하셨던 만주지역이기 때문이었다. 그분들이 헐벗고 굶주리면서도 만리타국인 길림성 통화현과 유하현에서 어려운 가운데서도 경학사(耕學社)와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조국의 독립을 위해 각고의 세월을 보내셨던 이역 땅을 100년만에 찾아 봤다. 당시는 삭풍이 몰아쳤던 허허벌판이었을 황량한 만주 땅, 그곳을 선열들께서 돌아가신 후 뒤늦게 찾아보았으니 조상에 대한 그리움과 감회가 어찌 남다르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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