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혜 사랑 코너

박근혜 대통령과 청와대 - 갈.

아까돈보 2013. 2. 5. 23:12

 

 

▲ 1993년 철거된 청와대 구 본관. photo 청와대 주변 역사·문화유산
박근혜 당선인은 오는 2월 25일 국회에서 18대 대통령 취임식을 마친 후 청와대로 들어간다. 1979년 11월 21일 흉탄에 쓰러진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의 영정을 앞세우고 동생 근영·지만과 함께 청와대를 나와 신당동 사저로 간 지 34년 만의 귀환이다. 자신이 이미 16년간이나 거주했던 청와대에 다시 들어가는 박 당선인의 심정은 복잡하기 짝이 없을 것 같다. 5·16 군사정변 이후 서울 장충동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공관에서 살던 박 당선인은 1963년 12월 17일 부모를 따라 청와대에 들어갔고 부모를 모두 여의는 아픔을 겪고 난 후 청와대를 떠났다.
   
   박 당선인이 34년 만에 다시 살게 된 청와대는 과거의 청와대와는 많이 달라졌다. 아버지로부터 딸로 주인이 바뀐 그 세월만큼이나 많은 변화를 겪었다.
   
   과거 박근혜 당선인은 청와대 본관에서 생활했다. 박 당선인이 ‘방이 많은 집’으로 기억하고 있는 구 청와대 본관은 1735㎡(525평) 규모로 지금과 달리 대통령 집무실과 거주 공간이 함께 있었다. 대통령 집무실 겸 서재가 1층에 있었고 2층에는 대통령과 가족들의 침실과 식당, 비서실장 방이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육영수 여사 서거 후 2층 침실 옆 식당에서 두 딸과 식사를 한 후 매일 아침 9시 1층으로 ‘출근’했다. 직원들이 1층 부속실 옆 주방에서 준비한 음식을 2층으로 날랐다. 박 대통령이 두 딸과 식사하는 동안 식당 맞은편 비서실장 방에서는 비서실장이 주관하는 수석비서관 회의가 8시부터 열렸다. 박 대통령은 1층 집무실에 출근한 후 수석비서관 회의 내용 등 각종 보고를 받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했다. 2층으로 ‘퇴근’ 시간은 오후 6시였는데 대통령과 두 딸, 숙직 직원과 경호원만 남은 오후 6시 이후 청와대 본관은 그야말로 ‘적막강산’이었다고 한다. 김계원 비서실장이 한때 본관 옆에 별채를 따로 지어 대통령과 가족들의 제대로 된 거주공간으로 삼자고 건의했으나 청와대 건물에 돈을 들이기 싫어하는 박 대통령이 반대해 무산된 것으로 알려졌다.
   
   
   본관의 변천사
   

▲ 1991년 완공된 현재의 청와대 본관. photo 조선일보 DB

조선시대 경복궁 후원에 자리 잡았던 청와대 본관은 일제강점기 총독 관사로 쓰이던 건물이다. 일제는 경복궁 후원에서 1937년부터 1939년까지 열렸던 조선박람회 이후 공원으로 쓰이던 행사장 자리에 조선 총독의 관사를 지었다. 이 조선 총독 관사는 미군정 때는 하지 중장의 관사로 사용되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대통령 집무실 겸 관사가 됐다. 이승만 대통령 때는 경무대로 불렸지만 윤보선 대통령이 1969년 12월 경무대를 청와대로 공식 개명했다.
   
   박근혜 당선인에게 아버지의 추억이 깃들어 있는 이 본관은 지금 없다. 1991년 구 본관 아래 쪽에 본관을 새로 지으면서 철거됐다. 노태우 대통령 시절인 1989년 착공해 2년의 공사 끝에 완공한 현재의 본관은 건면적 8476㎡(2564평)로 구 본관보다 5배 정도 크다. 청와대라는 말 그대로 지붕에 일반 도자기 굽듯 구워내 100년 이상 사용할 수 있다는 청기와가 15만장이 얹혀 있다. 1층에는 오찬 및 만찬 행사 등으로 사용하는 인왕실과 영부인 집무실, 접견실(무궁화실) 등이 있고 2층에는 대통령 집무실과 대통령이 외빈을 접견하는 접견실, 소수 인원이 참석하는 회의장인 집현실, 10명 이내의 인원이 식사를 할 수 있는 백악실 등이 있다. 이 같은 본채 양옆으로는 국무회의 및 임명장 수여 행사 등에 사용되는 서측 별채(세종실)와 중규모 오찬 또는 만찬 행사를 여는 동측 별채(충무실)가 있다.
   
   청와대는 현재의 본관을 지으며 대통령과 가족들이 거주할 관저도 따로 지었다. 2007년 대통령경호실이 펴낸 ‘청와대 주변 역사·문화유산’이라는 책에 따르면 1990년 10월 구 본관 뒤편에 들어선 관저는 전통 한옥 건물로, 강원도에서 벌채한 홍송을 사용하였다. 생활공간인 본채와 접견 공간인 별채가 있고 앞마당에는 전통 양식의 뜰과 사랑채를 만들었다. 대문도 전통 한옥 양식인 삼문으로 꾸몄다. 앞으로 박 당선인이 잠을 자고 생활할 공간이다.
   
   박 당선인 입장에서 아버지의 추억이 남아있는 공간은 상춘재일 것이다. 청와대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인 녹지원 뒤에 들어서 있는 상춘재는 66㎡(20평) 규모의 목조건물로 일제강점기 조선총독 관사의 별관이었다. 일제강점기 매화실이라 불리던 이 건물을 이승만 대통령이 상춘실로 바꿨고, 박정희 대통령이 1978년 낡은 건물을 헐고 새 목조건물을 지으면서 지금의 상춘재라는 이름을 붙였다.
   
   

▲ 청와대 상춘재


   기자들과 술 즐기던 상춘재
   
   박정희 대통령 시절 상춘재는 비좁은 본관 식당 대신 만찬 장소로 쓰였다. 특히 박 대통령은 일과 후 청와대 출입기자들을 불러 이곳에서 술을 즐겼다고 한다. 육영수 여사 서거 후 조선일보 청와대 출입기자를 지낸 안병훈 기파랑 대표는 “그냥 평범한 앉은뱅이 탁자에 대통령과 둘러앉아 술을 마시며 바깥세상 얘기 등을 나눴다”며 “금연을 선언한 박 대통령이 술자리에서 기자들에게 담배를 얻어 피우곤 했었다”고 말했다. 기자들과의 술자리에는 박근혜 당선인도 가끔 나타나 아버지 담배에 불을 붙여주곤 했었다고 한다. 현재의 상춘재는 전두환 대통령 때인 1983년 다시 지은 것으로, 박정희 대통령 때보다 규모가 커져 건면적 383㎡(116평)에 이른다.
   
   녹지원도 박 당선인에게는 추억의 공간이다. 수령 163년의 반송을 비롯해 120여종의 나무와 역대 대통령들의 기념식수가 있는 녹지원은 어린이날, 어버이날 등 각종 행사가 열리는 곳이다. 박 당선인도 육영수 여사 서거 후 영부인 역할을 대신하면서 이곳에서 많은 행사를 치렀다. 이곳에 있는 백합나무는 특히 육영수 여사가 좋아하던 나무로 알려져 있다.
   
   대규모 회의나 외국 국빈들이 방한했을 때 공식행사가 열리는 영빈관은 박근혜 당선인이 청와대를 떠난 직후 완공된 건물이다. 박정희 대통령 말기인 1978년 1월 착공해 박근혜 당선인이 청와대를 떠난 한 달 뒤인 1979년 12월 완공됐다. 지하 1층, 지상 2층 건물로 건면적 5183㎡다. 1층은 대접견실로 외국 국빈의 접견행사를 치르는 곳이고, 2층은 대규모 오찬 및 만찬 행사를 위한 장소다. 외국의 일반적인 영빈관과는 달리 숙박 시설은 없다.
   
   여민 1, 2, 3관으로 불리는 비서동과 출입기자들이 일하는 춘추관은 박 당선인에게는 낯선 공간이다. 두 건물 모두 노태우 대통령 시절 새로 지어졌다. 이 비서동 건물은 앞으로 박 당선인의 업무 스타일과 관련해 주목받는 곳이기도 하다. 계속 논란이 됐던 사안이지만 비서동 건물과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본관과는 거리가 500m 정도나 떨어져 있다. 참모들이 대통령에게 결재를 받기 위해서는 차를 타고 가야만 한다. 비서동과 본관까지 가는 길에는 검문소도 거쳐야 한다. 대통령이 참모들과 수시로 격의 없이 상의를 하는 게 구조상 거의 불가능하게 돼 있는 것이다.
   
   
   비서동·본관 너무 멀다
   
   역대 대통령들도 이 비서동과 본관의 ‘거리’에 불만과 불편함을 느껴 개선을 시도하기도 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집무실을 아예 세종로 정부종합청사에 두려하다가 경호 문제로 포기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본관의 내부 구조를 바꿔 참모들을 가까이 불러들이려 하다가 건축학적 가치가 있는 본관 건물을 훼손할 수 있다는 지적 때문에 자신이 비서동 가까이 다가서는 방법을 택했다. 기존 2개의 비서동에 더해 본관 가까이에 비서동을 하나 더 짓고 자신의 집무실을 여기에 만든 것이다. 현재의 여민 1관이 이 건물인데, 비서동 중 유일하게 청와대 안뜰인 녹지원 쪽에 대통령 전용 출입구를 두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초기에는 이 비서동 집무실에 자주 들러 참모들과 회의를 하곤 했으나 점점 본관 집무실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다고 한다.
   
   현재 박근혜 당선인 주변에서도 박 당선인이 본관 대신 이 비서동 집무실을 이용해야 한다고 건의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박 당선인의 한 측근은 “박 당선인이 비서동에 집무실을 두는 방안을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
   
   1990년 9월 건립된 춘추관은 지상 3층, 지하 1층에 1293㎡ 규모의 건물로 기자회견장과 출입기자실로 사용되고 있다. 이전에는 여민 2관 중앙기자실을 기자회견 및 출입기자실로 사용했지만 장소가 협소해 지금의 춘추관을 새로 지었다. 맞배지붕에 기와를 얹은 외형은 우리나라 최고의 조형미를 지녔다는 예산 수덕사 대웅전을 본뜬 것이다. 청와대 출입기자들은 춘추관 완공 이후 업무 환경은 더 좋아졌을지 모르지만 비서동 취재가 제한되는 등 취재 환경은 더 나빠졌다는 불만도 터뜨린다. 청와대가 제공하는 공식 브리핑만 들어야 하는 처지를 빗대 “청와대 출입기자인지 춘추관 출입기자인지 모르겠다”는 불만도 나온다.
   
   청와대는 34년 전과 비교하면 바깥 풍경도 달라졌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 청와대 앞길이 개방됐고 안가도 철거됐다. 박근혜 당선인으로서는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겠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을 맞고 쓰러진 궁정동 안가도 지금은 사라졌다. 궁정동 안가가 있던 자리에는 현재 1만㎡ 규모의 시민공원인 무궁화동산이 들어섰다. 무궁화동산 한복판에는 궁정동을 상징하는 우물정자 모양의 검은색 조형물이 있는데 이 조형물이 위치한 곳이 바로 박정희 대통령이 총탄을 맞았던 자리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현재 이 역사적 현장을 가리키는 푯말 등 흔적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청와대 바깥에도 새 건물 늘어
   

▲ 청와대 경내에 있는 대통령 관저. 전통 한옥 형태로 지어졌다. photo 청와대 주변 역사·문화유산

문민정부를 자처한 김영삼 정권은 이 궁정동 안가 철거를 문민정부와 군사독재를 대비시키는 홍보 이벤트로 삼았다. 철거 직전 3m 높이의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던 안가 내부를 공개했다. 이탈리아제 소파와 일제 온수식 변기, 대형 샹들리에 등 호화로운 안가 내부가 그때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박정희 정권을 이은 전두환 정권은 이 궁정동 안가가 흉흉하다며 삼청동에 안가를 새로 지었지만, 이 삼청동 안가도 지금은 대통령 비서실장과 헌법재판소장 공관으로 바뀐 상태다. 하지만 안가 일부는 남겨 지금 유일한 안가로 사용하고 있다. 궁정동·삼청동 안가 외에 청운동에도 안가가 있었지만 이 역시 헐려 지금은 없다.
   
   안가는 철거됐지만 청와대 바깥에는 박정희 대통령 이후 새로운 시설물들도 들어섰다. 청와대 경호원들의 체력단련, 훈련장 등으로 사용되는 연무관과, 국가홍보관·청와대 관람객들과 일반인들을 위한 편의시설 등이 들어선 청와대 사랑채가 대표적이다. 연무관은 노태우 대통령 시절 경호실 소유 부지에 지어졌고, 과거 대통령 비서실장 공관이 있던 자리에 들어선 청와대 사랑채는 1996년 청와대 앞길 개방과 함께 복합 문화공간 용도로 만들어졌다.
   
   청와대는 행정구역상 세종로와 궁정동, 삼청동을 포함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총독 관저 부지는 행정구역상 광화문 1번지로 분류된 대지 면적 64만4333㎡(19만4911평)의 광대한 공간이었으나, 광복 후 세종로 1번지로 행정구역이 변경됐고 경무대 부지도 23만978㎡(6만9871평)로 조정됐다. 청와대경호실이 펴낸 ‘청와대 주변 역사·문화유산’에는 “이후 사무공간의 확대와 경호 및 그와 관련된 건물, 시설을 확충하면서 청와대 경내 대지는 세종로 1번지 이외에 삼청동 157-94번지 외 9필지, 영빈관, 제101경비단, 구 연무관 위치인 세종로 1-91번지 외 17필지, 궁정동 1-2번지 외 43필지 등 3개동에 걸쳐 총 73필지 7만6685평으로 늘어났다”고 적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