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所感
퇴역 원로로부터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에 관한 두 가지의 일화(逸話)를 들었다. 혼자서 간직하는 것이 아깝게 생각되어 여기에 소개한다. 포로수용소에 분산 수용되어 있던 반공포로들이 이승만 대통령의 명령을 수행하는 한국군 헌병들에 의하여 일제히 석방되었다. 이 조치로 35,451명의 반공포로들 가운데 26,424명이 석방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에 의한 이 조치는 한국이 반대하는 내용으로 마무리되고 있는 판문점 휴전협상에 대한 그의 반대 의지를 극적으로 폭발시킨 거사였다. 이로 인하여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었던 판문점 휴전협상에는 예상치 않았던 위기가 조성되었다. 국민들의 협조 거부로 허사가 되었다. 결국 미국의 아이젠하워 정부는 문제의 반공포로 석방 직후인 6월에는 로버트슨(Walter Robertson) 특사를, 그리고 다음 달인 7월에는 덜레스 (John Foster Dulles) 국무장관을 서울로 파견하여 이승만 대통령의 반발을 무마하는 설득 외교를 전개했다. 이 과정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협상 타결을 묵인하는 대가로 <한미 상호방위조약>과 한국군 증강, 그리고 주한미군의 유지 등을 내용으로 하는 안보 공약을 미국으로부터 쟁취하는 뛰어난 외교적 수완을 과시했다. 나가서 애완용(愛玩用)으로 길들여진 참새 몇 마리를 사 오게 했다. 그는 이 참새들을 담은 새장을 당시 관저로 쓰던 경상남도 도지사 관저 정원의 나무 가지에 걸어 놓게 하고 그를 방문한 덜레스를 정원으로 데리고 나갔다. 자연스럽게 새장 안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참새들이 두 사람의 화제가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새장 속의 참새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이유는 새장을 벗어나고 싶어 하는 욕망의 표현이라고 말하자 덜레스는 “새장 안의 길들여진 새는 새장을 떠나지 않는 것이 아니냐”고 반론을 폈다. 반론에는 반공포로 석방이 포로들의 자의(自意)와는 상관없이 이루어진 것이라는 함의(含意)를 담고 있었다. 그러자 이승만 대통령은 “어디 그런가 보자”면서 새장의 문을 열어주었고 그 순간 참새들은 새장을 나와 공중으로 날아가 버렸다. 그 순간 이승만 대통령의 말이 이어졌다. “보라. 길들여진 참새도 저처럼 자유를 갈구하는 것이 아니냐.” 이 뒤로는 덜레스로부터 이미 기정사실화된 반공포로 석방 사실 자체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시비가 없었다는 것이다. 찾아 와서 “대통령 각하께서 이 고기를 드시고 힘을 내셔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주시라”면서 그가 가지고 온 미국산 쇠고기를 놓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이를 받지 않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지금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주먹밥과 소금으로 끼니를 때우면서 생명을 바쳐서 나라를 지키고 있는데 명색이 대통령인 사람이 어떻게 이 고기를 먹을 수 있겠느냐”면서 무치오가 가지고 온 쇠고기를 되돌려 들려 보냈다는 것이다. 우남(雩南) 이승만 박사에 대한 엇갈린 평가가 정리되고 있지 않다는 것일 듯 하다. 그 결과로 지금 가장 많은 고등학교가 채택하고 있는 <금성출판사> 간행 <한국 근ㆍ 현대사>에는 김일성(金日成)의 사진과 김정일(金正日)의 사진이 각기 3매와 2매가 실려 있는 반면 이승만 대통령의 사진은 김구(金九)와 함께 찍은 사진 1매가 달랑 실려 있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것은 당연하다. 그에게는 독재와 장기집권의 오명(汚名)이 씌워져 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 오명을 덮고도 남을 정도로 많은 공적(功績)이 있는 위인(偉人)이기도 하다. 모든 것을 떠나서 그는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들에게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게 해 주고 북한이 걸어간 길을 가지 않게 만들어 준 은인(恩人)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긍정적 측면에 대해서는 역시 그것대로 평가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는가? 그리고 그렇게 하여 당시를 체험하지 못 하고 오직 책을 통하여, 또는 전문(傳聞)을 통하여, 그를 접해야 하는 후대(後代)들이 이 나라 초대 대통령을 객관적으로, 그리고 사실적(寫實的)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은 열어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땅에서 건국하면서 ‘친일’ 경력을 가진 전문가들을 ‘용인(用人)’의 차원에서 활용했다는 것이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을 이해한다고 하자. 그러나, 그가 1945년 해방과 더불어 미국으로부터 귀국할 때까지 수십년간 풍찬노숙(風餐露宿)을 무릅쓰고 해외의 객지를 전전(輾轉)하면서 벌인 항일독립(抗日獨立) 운동에 대한 평가는 어째서 그렇게 인색해야 하는가? 그를 비평하는 사람들은 과연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기습을 앞두고 그가 저술하여 태평양전쟁 발발과 더불어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Japan Inside Out’ (‘일본, 그 가면의 실체’)를 한 번 읽어보기라도 했단 말인가? 있다. <月刊朝鮮>이 11월호로 68회째 연재(連載)하고 있는 역작(力作) <孫世一의 비교평전: 한국 민족주의의 두 유형(類型) - 이승만과 김구>가 그것이다. 더구나, 해방 이후 ‘해방공간’에서, 그리고 대한민국의 건국과정과 6.25 전쟁 전후 이승만이 전개했던 대미외교를 기록으로 접하는 기회를 갖는 사람이라면 이승만을 가리켜 ‘미국의 앞잡이’라고 폄하(貶下)하기는 어렵다는데 이론의 여지가 없다. 유엔군 사령관에게 위양하고 있는 상황 하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국가와 민족의 이익을 위하여 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권도(權道)로 일시 행사하는 모습을 보여 준 사건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장악하고 있는 유엔군 사령관의 지시가 없다”고 난색을 표하는 정일권(丁一權) 육ㆍ해ㆍ공군 참모총장에게 “당신은 나의 참모총장이냐, 아니면 유엔군 참모총장이냐”고 몰아세워 결국 그의 38선 돌파 명령을 수행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38선 돌파가 결행된 날인 10월1일이 지금 <국군의 날>이 되어 있다. 이름의 한 원로 퇴역 언론인으로부터 최근 들은 이승만 대통령에 관한 두 토막의 일화를 독자들과 공유하면서 덧붙여서 소감을 적어 보았다.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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