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있는 내동기들

청려장(靑藜杖)에 대하여 - 오토산

아까돈보 2018. 10. 5. 07:35




 

청려장(靑藜杖)에 대하여



     

                                                  잘라놓은 명아주 줄기


고려 말기에 《주역(周易)》을 받아들인

역동(易東) 우탁(禹倬, 1262∼1342) 선생은

늙음을 탄식하는 노래라〈탄로가(歎老歌)〉 한 수를 남겼다. 
 
한 손에 막대 쥐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늙는 길을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을 막대로 치려했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누나



이 시조에서 막대는 지팡막대, 곧 지팡이다.

동서를 막론하고 지팡이는 노화의 표지이자, 권위의 상징이다.

팡이는 신분이나 경제력, 나이, 취향, 용도 등에 따라

제각각 다른 소재로 만들어졌지만 그래도 꼽아주었던

청려장(靑藜杖), 연수장(延壽杖), 여의장(如意杖) 세 종류였다.



연수장벼락 맞은 감태나무로, 여의장쇠로 만들었다.
청려장은 1년생 잡초인 명아주로 만든 지팡이이다.


명아주는 우리나라 산야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홍삼려·학정초·능쟁이·연지채·도트라지 등으로 불려진다.

어린 싹은 봄날에 나물로도 쓰인다.

줄기가 가볍고 단단한데다가 손에 쥐는 느낌이 좋고,

구불구불 생긴 모습이 멋스러워 예로부터 지팡이의 재료로 쓰여 왔다.


그런데 청려장이 희귀한 이유는 지팡이를 만들만큼 한 해 동안

높이 자라는 명아주를 좀처럼 얻기가 힘든 탓이었다.

(오늘날에는 자연산 명아주 대신 육묘 재배한 명아주로 청려장을 만든다.

경상북도 문경시 호계면이 대표인 산지이다.)


    

           무더운 여름 날, 훌쩍 자란 명아주의 줄기가 굵어진다


청려장은 《습유기(拾遺記)》라는 중국의 전설집에 가장 먼저 출현한다.

 다음은 그 내용이다.


전한(前漢)의 학자 유향(劉向)이 천록각(天祿閣)에서 책 교정에 몰두하고 있었다.

어느 날 밤에 한 노인이 나타나 청려장(靑藜杖)을 밖에 꽂아두고 문을 두드리다가,

유향이 어둠 속에 혼자 앉아 글 외우는 것을 보았다.

노인이 청려장 꽂아둔 곳으로 가서 지팡이 끝을 입으로 부니,

환한 빛이 발하여 유향을 비추었다.


유향이 노인에게 성명을 묻자, 자신은 태을(太乙)이라는 별의 정기라고 답하였다.

그리고는 “천제(天帝)께서 유(劉)씨 중에 박학한 자가 있으니,

가서 보고 오라고 명하시기에 온 것이다.”라고 대답하고서는,

품속에서 천문지도(天文地圖)를 꺼내 유향에게 주었다.


이 일로 인해, 유향은 마침내 천문과 지리까지 꿰뚫는 큰 학자가 되었다. 
명나라의 명의 이시진(李時珍)은 《본초강목(本草綱目)》에서

청려장을 짚고 다니면 중풍에 걸리지 않는다.”고 하였다.

민간에서는 눈이 밝아지고 신경통에 좋다며 애용하였다. 


   

              껍질을 벗기고 칼과 사포로 곱게 다듬어 놓은 명아주 줄기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통일신라 때부터

장수한 노인에게 왕이 직접 청려장을 하사했다고 한다.


조선조에서는 나이가

50이 되었을 때 자손들이 바치는 청려장을 가장(家杖)이라 하였고,

60이 되면 마을에서 주는 것을 향장(鄕杖),

70이 되면 나라에서 주는 것을 국장(國杖),

80이 되면 임금이 내려주는 것을 (朝杖)이라고 불렀다.


이 가운데 國杖 이상을 짚은 노인이 마을에 들어서면 원님이 직접 나가 맞이했다 한다.

특히 임금이 직접 하사하는 청려장은 의미가 깊었으니,

장수한 사람에게는 물론이오, 계에서 은퇴한 원로대신들에게 내려주기도 하였다.


안동의 도산서원(陶山書院)에는 퇴계(退溪) 선생께서 쓰시던 청려장이 보존되어 있다. 

1999년 영국의 엘리자베스2세 여왕이 안동을 찾았을 때

특별히 청려장을 선물로 준비하였다.


오늘날 정부에서도 매년 노인의 날(10월 2일) 즈음해서

100세를 맞은 노인들에게 건강과 장수를 기원하는 뜻으로 청려장을 선물한다.


청려장에도 남녀의 구분이 있었다.

남자들은 손잡이 부분이 반원 모양인 것을 주로 사용하였다.

여자들은 약간 구부러졌거나, 일자 모양인 것을 선택했다.



                              남녀용의 청려장 한쌍


아래에 소개하는 시조는 조선 영조(英祖) 때 활동하던

노강(盧江) 조명리(趙明履.1697(숙종23)∼1756(영조32)의 작품이다.

그는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던 인물로, 풍류가 깊었던 모양이다.

시조 4수를 남겼는데, 그 중의 한 수다.


청려장(靑藜杖)을 던지며 합강정(合江亭)에 올라가니
동천(洞天) 명월(明月)에 물소리뿐이로다
어디서 생학선인(笙鶴仙人)은 날 못 찾아 하느니
 
정계활동을 마치고 은퇴한 나날인가?

임금에게 받은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청려장을 짚고 합강정이란 정자에 올랐단다.

합강정은 강원도 인제군 합강리에 있는 정자로, 인제8경에 속한다.


그런데 보이는 건 밝은 달님이오, 들리는 건 물소리뿐이다.

자연과 하나가 된 노강의 기쁨은 마치 신선이라도 된 듯하다.

그러기에 학을 타고 생황을 부는 신선이 왜 날 찾아오지 못하느냐고

반문하면서 종장(終章)을 매듭지었다.


남파(南波) 김천택(金天澤)  숙종 때 포교를 지낸 평민이다.

그는 창곡(唱曲)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졌으며

청구영언(靑丘永言) 등의 가곡집을 편찬하여 시조의 정리와 발전에 공헌했다.

그의 시조에도 청려장이 나온다.


청려장(靑藜杖) 힘을 삼고 남묘(南畝)로 내려가니
도화(稻花)는 흩날리고 소천어(小川魚) 살졌는데

원근에 즐기는 농가(農歌)는 곳곳에서 들리네


   



고려말 조선초의 학자이자 문인인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1330(충숙왕17)~?)은






조선 태종의 어릴적 스승이었다.

고려가 망하자 치악산에 숨어든 뒤 

조선에 출사하지 않고 고려에 대한 충절을 끝까지 지켰다.

흥망이 유수(有數)하니 만월대도 추초(秋草)로다. 
오백년 왕업이 목적(牧笛)에 부쳐시니 

석양에 지나는 객이 눈물겨워하노라. 


원천석(元天錫)의 시조 회고가(懷古歌)다.

치악산 서쪽의 원주시 행구동 석경마을엔 그의 무덤이 있다.

‘돌갱이’라고 부르는 석경마을 돌이 많은 산길이라는 뜻이다.

 

마을 안쪽의 석경사(石逕寺)에는 운곡을 기 재실 ‘모운재(慕耘齋)’와

비석, 시비(詩碑)가 있다.

시비에는 회고가(懷古歌)와, 석경마을을 배경으로 한 조가 적혀 있다. 

여기에도 청려장이 나온다.




청려장(靑藜杖) 드더지어 석경(石逕)을 돌아드니
양삼선장(兩三仙庄)이 구름에 잠겼세라.
오늘은 진연(塵煙)을 다 떨치고 적송자(赤松子)를 좇으리라.


 

    

                명아주의 뿌리 쪽이 청려장의 손잡이가 된다


다음은 송현수(宋顯洙, 1801∼?)란 분이 남긴 옛글이다.

청려장을 얻은 기쁨 그득한 내용이다.


일만이천봉에서 자란 명아주가 전세의 인연으로

73세 늙은이 만나 잘 부축해주니, 너의 공이 크도다.

금강산이 동국의 명산임은 천하가 다 아는 바이다.


그러므로 세상 바깥으로 속세를 벗어난 고상한 사람이나

빼어난 선비들은 보지 못한 이가 없다.

나도 뜻이 있었으나, 못내 이루지 못한 것은 멀기도 하거니와

 속된 생각에서 어나지 못해서였다.


을묘년 가을 나의 벗 김이백이 과거를 치르고 고향으로 돌아올 때,

수원의 길거리에서 한 스님을 만나 어디 사느냐고 묻자,

금강산이라고 답하였다.

지팡이를 물으니 청려장이라고 하였다.


친구가 남쪽에는 청려장이 귀하고 북쪽에는 대지팡이가 드무니

자신의 대지팡이와 스님의 청려장을 바꾸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다.

스님은 빙그레 웃으며 허락하였다.


그가 이를 가지고 와 내게 보낸 것은 내가 병이 잦아

몸이 쇠약함을 염려한 탓이

지팡이를 살펴봄에, 크기와 길이가 적당한데다가

또 단단하고 가벼웠으니, 참으로 좋은 지팡이였다.
나는 생각다가 “그 스님은 장안사나 표훈사의 스님인가??

이 지팡이는 비로봉이나 만폭동에서 자란 나무인가?

일만이천봉의 맑은 기운을 스님이 얻어 여기에 담아 천리 밖의 내게 보내왔으니,

 내가 전생에 금강산과 인연 있어 산의 영령이 사람을 시켜

멀리 내게 전해준 것인가?”라며 기뻐하였다.  
                              





                             친구를 찾아서(尋訪) ㅣ梅月堂 金時習

                   靑藜一尋君 (청려일심군) : 청려장 짚고 그대 찾으니




                         君家住海濱 (군가주해빈) : 그대 집은 바닷가에 있었구나


                         寒花秋後艶 (한화추후염) : 국화꽃은 늦가을이라 더욱 곱고


                         落葉夜深聞 (낙엽야심문) : 깊은 밤 낙옆 지는 소리 들려


                         野外金風老 (야외금풍로) : 들 밖에 바람소리 세차고


                         簷頭夕照曛 (첨두석조훈) : 처마 위엔 저녁빛이 어둑해진다


                         寧知今日遇 (녕지금일우) : 어찌 알았겠나, 오늘 그대 만나  


                         團坐更論文 (단좌갱론문) : 다정히 둘러 앉아 다시 글을 논할 줄을




    俛仰亭 三言歌  | 俛仰 宋純   

  俛有地 仰有天   굽어보면 땅이요, 우러러보면 하늘이라    
  亭其中 興浩然   그 가운데 정자를 짓고, 흥취가 호연하다.    
  招風月 揖山川   바람과 달을 불러들이고, 산천을 끌어 들여  

  扶藜杖 送百年   청려장을  짚고 백년을 보내리라.  



       


                담양  면앙정에 걸려 있는  <三言歌> 현판



                                


                  가사문학관에 복원한 <三言歌>




<三言歌>는 宋純(1493(성종14)~1582(선조15)이  


     면앙정에서 지은 석 자씩 여덟 줄로 된 漢詩이다. 



                              청려장의 재료인 명아주를 재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