姓氏의 故鄕

江陵 金氏(강릉김씨) (5).

아까돈보 2010. 3. 9. 16:51

 

 


江陵金氏(강릉김씨)

▶始 祖 : 金周元
▶集姓村 : 京畿道 東頭川市寶山里


江陵金氏의 始祖 金周元은 新羅統一을 이룩한 太宗武烈王 金春秋의 5世孫이다.
그는 777年(海恭王13年) 李湌(찬)으로 侍中이 되었고, 785年(善德王6) 王이 죽고 아들이 없어 여러 臣下들의 會議에서 王으로 推戴되었으나 갑자기 큰 비가 내려 閼川(알천)의 물이 氾濫하여 건너지 못해 入闕하지 못하게 되자 이는 하늘의 뜻이라 하여 卽位를 抛棄하였다.
이에 元聖王이 卽位하니 그가 奈勿王의 12代孫金敬信이다.其後元聖王은 그에게 王位에 오를 것을 勸誘했으나 끝내 辭讓하고 江陵으로 隱居하자 元聖王은 그의 兼遜함에 感服하여 溟洲君: (只今의 江陵)王으로 封했다. 그리하여 後孫들은 江陵을 本貫으로 삼아 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後孫으로는 始祖 周元의 8世孫 上琦가 高麗 睿宗때 平章事를 歷任했고 그의 아들 仁存과 沽9고)도 平章事를 지냈다.
한편 仁存의 아들 3名도 모두  平章事를 歷任하여 名門의 傳統을 이어왔으나, 朝鮮때 와서 家門에 우뚝선 人物을 世祖의 悖倫에 痛憤하고 抵抗하여 매서운 節義를 지켰던 生六臣의한 사람인 梅月當 時習을 들수있다.
그는 周元의 22世孫으로 3歲에 이미 詩에 能했고 5歲 때「中庸」「大學」을 通達하여 神童으로 이름났다.
일찍이 成均館 大司成 金泮(김반) 門下에서 글을 읽고 師範之宗으로 일컬어진 尹祥에게서 「禮書)」「諸者百家」를 배웠다.
1455年(世祖1) 나이 21歲 때 三角山 重興寺에서 工夫하다가 首陽大君이 端宗을 몰아내고 王位에 올랐다는 消息을 듣고 痛憤하여 읽던 冊을 모두 불태워 버리고 중이 되어 이름을 雪岑(설잠)으로 고친 後 放浪의 길을 떠났다.
1458年(世祖4) 冊을 求하러 漢陽에 갔다가 孝寧大君의 勸告로 世祖의 佛經諺解(불경언해) 事業을 도와 內佛黨에서 矯正의 일을 맡았으며 1465年(世祖11) 慶州 南山에 金鰲山室(금오산실)을 짓고 讀書를 始作하여 「山居百詠」을 썼다.
其後 數次에 걸쳐 「金鰲新話」와 「梅月當集」「十玄談要解」等의 名作著書를 남겼다.
그는 節介를지키며 高高한 知性으로 佛敎와 儒敎의 精神을 아울러 包攝한 思想과 卓越한 文章으로 現實에서 이루지 못한 理想의 世界를 文學에서 찾으며 살다간 不幸한 天才였다.
禮曺判書를 歷任한 添慶의 玄孫 始奕(시혁)은 判敦寧府事를 지냈으며 始煥과 始炯도 禮曺 및 兵曺判書를 歷任하였다.
始煥의 아들 尙星은 戶曺 및 禮曺判書에 올랐으며 始煐(시영)의 아들 尙集은 1755年(英祖31) 定試文科에 及弟하고 史官을 거쳐 1761年(英祖37) 正言이 되어 이듬해 景賢堂9경현당)의 文臣 製述(제술)에서 壯元하여 文名을 날렸다.
始煐의 아들 尙喆은 1736年(英祖12) 定試文科에 及弟, 持平 · 校理에 이어 1757年(英祖29) 忠淸道觀察使를 거쳐 1766年(英祖 42) 右議政에 오르고 1772年左議政,1775年에는 領議政에 올랐다. 
其 外 啓洛은 文科에 及弟하고 여러 官職을 거쳐 右參贊 ·大司憲 等을 歷任하였으며 經史百家에 通達하여 文章으로 名聲을 날렸다.
哲命의 아들 起宗이 1618年(光海君10) 文科에 壯元하고 李适의 亂 때 武功을 세워 進武功臣 2等에 올라 벼슬이 戶曺判書에 이르렀다.
朝鮮의 文臣 行은 國平의 아들로 1566年(明宗21) 別試文科에 及弟하고 1575年(宣祖8) 茂長縣監이 되어 安平大君의 證道歌를 刊刻하여 刊行했고 글씨에도 뛰어났다.
大司諫을 거쳐 刑曺判書에 오른 華鎭과 易學과 性理學의 大家鴻運(홍운)等 많은 人物들이 名門의 傳統을 이어왔다.    

2009.  11.  5. 伍民 轉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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