加平李氏(가평이씨)
始祖 : 李仁輔
本貫 : 朝宗.加平
加平은 京畿道中東部에 位置하는 地名으로,高句麗時代에는 斤平郡 또는 倂平郡이라 하다가 757年(景德王16)에 嘉平郡으로 改稱되었고,1018年(高麗 顯宗9)에 江原道 春城郡에 屬하였다.1396年(太祖5)에 朝宗縣을 廢合하고 1413年(太宗13) 改例에 따라 江原道에서 京畿道로 遍入하였으며,1525年(中宗20)에 從來의 顯이郡으로 昇格되었다.1697年(肅宗23)에 다시 縣으로 降等되었다가 1707年에 다시 郡으로 昇格되고,其後 1888年(高宗25)에 春城府 屬하였다가 1894年에 京畿道로 還屬되면서 抱川郡에 屬하게 되었다.1896年 官制改革으로 全國을 13道로 分割하면서 加平郡으로 하였다.加平李氏는 新羅 때 完山戶長을 지낸 李仁輔를 始祖로 하고, 그의 8世孫 起文이 朝宗(朝宗 : 加平의 옛 地名)에 移居하여 本貫을 朝宗으로 삼았다. 其 後 29世孫인 椿桂(춘계)가 高麗에서 版圖判書를 歷任하고,그의 曾孫 亨孫이 朝鮮 世祖 때 兵馬節度使로 李施愛의 亂을 討平한 功으로 嘉平君에 封해졌으며 地名의 變遷으로 朝宗이 加平으로 改稱됨에 따라 本貫을 加平으로 삼아 世系를 이어왔다.그러나 <朝鮮氏族統譜>에는 亨孫의 八代祖로 戶長을지낸 珍守를 始祖로 記錄하고 있다.家門의 代表的인 人物로는 椿桂의 孫子 多林과 曾孫인 允孫·亨孫兄弟가 有名했다.多林은 朝鮮 때 武科에 及弟한 後 同知 中樞院事·副摠管에 이르렀으며,允孫은 定宗 때 登科하여 文宗朝에 兵曹判書를 지냈으며, 亨孫은 1447年(世宗29) 武科에 及弟하여,全羅道 副節制使 兼全州府尹이 되고 1492년(成宗 23) 羽林衛將에 이어 副摠管을 兼任했다.其外 兵曹參判 長生과 縣監을 지낸 長卿,壬辰倭亂 때 副護軍을 歷任한 命百과 景宗 때 學者로 이름난 齊台(재태) 等이 家門을 빛냈다.
1985年 經濟企劃院 人口調査 結果에 依하면 加平李氏는 南韓에 總 4,066家口,18,623名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加平李氏歷代主要人物
李 忱(침)은 高麗 때 都評議司事를 지냈셨다. 李多林은 朝鮮때 武科에 及弟한 後 同知中樞院事,副摠管에 이르렀다. 李允孫은 諡號는 章簡이며 朝鮮朝 定宗때 武科에 及弟하여 平安道兵馬節度使,都摠管 等을거쳐 兵曹判書를 歷任하셨다. 李亨孫은 1418年(太宗18)~1496年(燕山君2)때 朝鮮의 武臣이며. 字는 昌伯이고, 諡號는 平胡이다.
多林의 아들.內禁衛에 登用되고,1447年(世宗29) 武科에 及弟 ,吉州判官,軍器寺副正(군기시부정)等을 거쳐 藍浦鎭(남포진),沃溝鎭(옥구진)의 兵馬使에 이어 咸吉道都鎭撫使,義州牧使를 歷任하였고‘ 1467年(世祖13) 朴忠善과 함께 平安道의 征兵을 이끌고 李施愛의 亂의 平征에 功을세워 敵愾功臣(적개공신) 2等으로 嘉平君에 封해졌다. 이어 全羅道副節制使 兼 全州府尹이 되고,公州),淸州의 牧使를 거쳐 1492年(成宗23) 庶孼(서얼)로써 羽林衛를 設置할 때 그 將이 되었으며, 이어 副摠管을 兼任했다. 李鐵根은 朝鮮 때 武科에 及弟하여 抱川,忠州,珍山,鳳山郡守(抱川,忠州,珍山,鳳山郡守)를 지냈다. 李鐵榮은 朝鮮朝때 生員,進士試에 合格하였고 孝行과 淸廉함으로 薦擧되 어 益山郡守을 歷任하였다. 李長生은 成宗때 進士가되어 其後安陰縣監을지냈다. 李敏進은 號는 白峯이며, 1636年(仁祖14 丙子胡亂)때 仁祖가 避亂을가자 義兵을 일으켜 廣山에서 擊戰끝에 戰死하다. 左承旨에 追贈되었고 旌閭가 세워졌다. 李命百은 號는 寒圃齋이며, 1592年(宣祖25) 壬辰倭亂 때 報恩에서 倭敵을 防禦하다 戰死했다. 吏曹判書에 追贈되다. 李齊台는 號는 鳴溪이고 朝鮮 景宗 때 文科에 及弟하여 湖堂 에 뽑혔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後進 養成에 힘쓴 學者였다. 李齊恒은 號는 三梅堂,1735年(英祖11) 文科에 及弟한 後 吏曹佐郞,承旨等을 歷任하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