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麗時代에 僉議政丞(첨의정승)을 지낸 李混(이혼)을 비롯하여 都僉議贊成事(도첨의찬성사)를 지낸 李之氐(이지저),知春秋館事(지춘추관사)를 지낸 李彦
沖(이언충) 等 많은 官職者(관직자)를 輩出(배출), 家門의 기틀을 잡았다. 特히,李思敬(이사경)은 1356年西北面 兵馬府事(서북면 병마부사)를 지내고
判司宰監事(판사재감사)에 올랐다.
朝鮮時代에 李貞幹(이정간)은 蔭補(음보)로 登用되어 江原道 都觀察使(도관찰사)에 이르러서 中樞院事(중추원사)에 任命되었고, 世宗으로부터 机杖(궤장), 酒樂(주악)과 "家傳忠孝 世守仁敬(가전충효 세수인경)"라는 여덟자의 親書를 받았다.世祖때의 李禮長(이예장)은 兵曺參義(병조참의)를 歷任하였고,李德良(이덕양)은 戶曺判書를 지냈는데 그는 벼슬하면서 淸廉(청렴)으로 一貫했다. 李壽男(이수남)은 1458年文科及弟하고 1471年 佐理功臣(좌리공신)으로 全山君에 封해졌으며 兵曺判書(병조판서)에 追贈(추증)되었다. 李孝碩(이효석)은 蔭補(음보)로 定平府使(정평부사)로 在任中 侵入한 胡賊(호적)과 싸우다 戰死(전사)하였고,明宗때의 李俊民(이준민)은 1549年文科及弟
하고 여러 內外職을 거쳐 左參贊(조참찬)에 이르렀으며, 李濟臣(이제신)은 1564年文科及弟, 1568年 謝恩使(사은사)의 從事官(종사관)으로 明나라에 다녀왔다. 그는 詩文과 書藝에 能했고 領議政에 追贈되었다. 仁祖때의 李尙眞(이상진)은 1645年文科 及弟하여 여러 官職을 거쳐 右議政을 지냈고, 李天相(이천상)은 裵幼樟(배유장)에게 修學,性理學(수학,성리학)에 正統했으며,李滉(이황)과 李縡(이재)를 私淑(사숙)했다.그는 學行으로 參奉에 주어졌으나 就任하지 않고 後進養成(후진양성)에 힘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