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世孫인 李瑨(이진)은 高麗 高宗 때 사람으로 文科에 及弟하고 承文學士(승문학사)가 되었으며李尊庇(이존비)는 元宗 때 文科에 及弟하여 判密直司事(판밀직사사)를 지냈다. 그리고 李瑀(이우)는 忠肅王 때 사람으로 門下侍中(문하시중)을 지냈으며 文章과 德行이 높아 後에 鐵城府院君에 封해졌다. 또 忠宣旺 때의 李嵒(이암)은 1313年 文科에 及弟 贊成事(찬성사)를 거쳐 左政丞(좌정승)이 되었고 恭愍王 때의 李琳(이림)은 門下侍中을 지냈다.
朝鮮時代의 李懃(이근)은 判中樞府事(판중추부사),李原(이원)은 左議政,李陸(이육)은 兵曺參判을 지냈다. 또 中宗 때의 李澤(이택)은 禮曺判書, 李成吉(이성길)은 戶曺參判을 歷任하였다. 李适은 朝鮮 宣祖 때의 사람으로 武科에 及弟하여 刑曺佐郞(형조좌랑), 泰安郡守(태안군수)를 歷任하였으며, 1622年 仁祖反正(인조반정)에 加擔하여 反正을 成功케 했다.1624年에는 無能한 廷臣(정신)들을 除去코자 義兵을 일으켜 서울을 無血占領(무혈점령)했으나,張
晩(장만)이 거느린 官軍에 依해 平征되었다(李适의 亂). 舊韓末의 李沂(이기)는 일찌기 實學을 硏究하여 丁若鏞(정약용),柳馨遠(유형원) 等의 學統을 繼承하고張志淵(장지연) 等과 大韓自强會(대한자강회)를 組織하여 民衆啓蒙(민중계몽)과 抗日運動을 하였으며,1907年 決死隊 自新會(자신회)를 組織, 乙巳5敵의 暗殺을 企圖(기도)했으나 失敗하고 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