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麗時代(고려시대)에 門下侍中平章事(문하시중평장사)를 지낸 趙旅(조여)를 비롯해 門下侍中(문하시중)을 지낸 趙元吉(조원길),典工判書(전공판서)를 지낸 趙瑛(조영), 典農寺副正(전농사부정)의 趙瑾(조근), 朝鮮朝(조선조)에 兵馬節度使(병마절도사)를 지낸 趙崇文(조숭문)등 여러官職者(관직자)를 輩出(배출)하면서 家門(가문)의 繁盛(번성)을 누렸다.
趙元吉(조원길)은 鄭夢周(정몽주), 薛長洙(설장수)와 함께 恭讓王(공민왕)을 擁立(옹립)한 功으로 1等功臣(일등공신)이되고 玉川府院君(옥천부원군)에 封(봉)해졌다. 그는 高麗(고려)가 亡(망)하자 淳昌(순창)에 들어가 다시 벼슬하지않고 끝까지 節義(절의)를 지켰는데 牧隱(목은) 李穡(이색) 等(등)과 함께 5隱(은)으로 불리었다. 그리고 趙瑛(조여) 亦是(역시)高麗(고려)가 亡(망)하자 淳昌(순창)에 隱居(은거)하며 벼슬하지 않았는데 太宗(태종)으로부터 父子三賢(부자삼현)이란 稱頌(칭송)을 들었다.父子三賢(부자삼현)이란 아버지 趙元吉(조원길),同生(동생) 趙允(조윤) 그리고 趙瑛(조영)을 말한다.
趙哲山(조철산)은 1456年端宗復位(단종복위)를 꾀하다가 流配(유배)되어 死刑(사형)되었는데 端宗(단종)의 廟庭(묘정)에 配享(배향)되었다.趙琛(조침)은151
5年 別試文科(별시문과)에 及第(급제)하여 翰林學士(한림학사), 成均館大司成(성균관대사성)을 지내고 藝文館提學(예문관제학) 義禁府事(의금부사)를 歷任(역임)하였으며,趙挺(조정)은 經學(경학)에 밝아 金海府事(김해부사)를 歷任(역임)하고 壬辰倭亂(임진왜란)이 일어나자 義士(의사)70餘名(여명)을 糾合(규합)하여 高敬命(고경명)과 合勢(합세)하여 錦山(금산)싸움에서 倭賊(왜적)을 無數(무수)히 죽이고 殉節(순절)하였다. 趙大春(조대춘)은 學文(학문)에 精通(정통)하여 行平原縣監(행평원현감)을 지낸 뒤 乙巳士禍(을사사화)로 隱居(은거)하여 亭子(정자)를 짓고 金麟厚(김인후), 白廣勳(백광훈) 等(등)과 더불어 詩(시)와 술로 交流(교류)를 즐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