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時代(조선시대)에 監察(감찰)을 지낸 趙瓚(조찬)을 비롯하여 司成(사성)을 지낸 趙元卿(조원경),始祖(시조)의 10代孫으로 輔德(보덕)을 지낸 趙之瑞(조지서),軍資監正(군자감정)을지낸 趙翊(조익),都事(도사)의 趙應恭(조응공
)丞旨(승지)의 趙瑗(조원)等(등) 여러 官職者(관직자)를 輩出(배출)하면서家
門(가문)의 繁盛期(번선기)를 맞이하였다.또,3代가 모두 詩文(시문)으로 이름을 떨친 趙瑗(조원),趙希逸(조희일), 趙錫馨(조석형)이 있다.趙瑗(조원)은 宣祖(선조)때 正言(정언)이 되어 黨爭(당쟁)의 廢害(폐해)를 上疏(상소)하였으며,뒤에는 丞旨(승지)에 이르렀고" 讀書講疑(독서강의)"等(등)의 著書(저서)가 있다.趙希逸(조희일)은 1602年別試文科(별시문과)에 丙科(병과)로及第(급제)하고 監察(감찰)을 거쳐 禮曺參判(예조참판)等(등)을 歷任(역임)하였으며 書畵(서화)와 詩文(시문)에 能(능)하여 "竹陰集(죽음집)" 等을 남겼다.趙錫馨(조석형)은 仁祖(인조)때 進士試(진사시)에 1等(등)으로 合格(합격)하였으나 一切(일체)의 벼슬을 拒否(거부)하고 學文(학문)에만 專念(전념)하였으며, 特(특)히 唐詩(당시)에 精通(정통)하였다.
朝鮮(조선)宣祖(선조)때의 趙希哲(조희철)은 都事(도사)를 지냈는데 壬辰倭亂(임진왜란)때 그의 兄(형) 趙希正(조희정)과 함께 殉節(순절)하자 朝廷(조정)에서 이를 表彰(표창)하고 三綱綠(삼강록)에 冊祿(책록)케 하였으며 雙旌閭門(쌍정여문)을 세우게 하였다. 趙希進(조희진)은 副事(부사)를 歷任(역임)하였으며 趙遠期(조원기)는 1660年 增廣文科(증광문과)에 丙科(병과)로 及第(급제), 三司(삼사)의 벼슬을 거쳐 黃海道(황해도) 觀察使(관찰사)에 이르렀다.趙世煥(조세환)은19歲(세)때 司馬試(사마시)에 合格(합격)했으나 1637年三田渡(삼전도)의 屈辱(굴욕)과 1644年 明帝(명제)의 죽음으로 衝擊(충격)을 받아 벼슬을 斷念(단념)하고 故鄕(고향)에서 農事(농사)에 從事(종사)했다. 1657年 式年文科(식년문과)에 甲科(갑과)로 及第(급제), 通政大夫(통정대부)에 올라 東萊府使(동래부사)로 赴任(부임)하여 私財(사재)로 貧民(빈민)을 求濟(구제)하고 宋象賢(
송상현)의 祀堂(사당)을 修築(수축)하는等(등)善政(선정)을 베풀어 王(와)
으로 부터 말과 金品(금품)을 下賜(하사)받고 全羅道觀察使(전라도관찰사),丞旨(승지)等(등)을 歷任(역임)했다.英祖(영조)때의 趙明鼎(조명정)은 174
0年庭試文科(정시문과)에 甲科(갑과)로 及第(급제),忠淸道觀察使(충청도관찰사)를거쳐 吏曺判書(이조판서)를지냈고 趙正萬(조정만)은 刑曺判書(형조판서)를 지냈는데 經史百家(경삽백가)에 精通(정통)했으며 詩文(시문)과 書藝(서예)에도 뛰어났다.
그 밖에, 漢文小說(한문소설) "彰善感義錄(창선감의록)"의 著者(저자)로 알려진 趙聖期(조성기), 興宣大院君(흥선대원군)의 사위로서 工曺(공조)와 禮曺判書(예조판서)를 歷任(역임)하고 日本政府(일본정부)가 준 男爵(남작)의 爵位(작위)를 拒絶(거절)한 趙慶鎬(조경호) ,議政(의정)을 지낸 趙秉鎬(조병호) 等(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