姓氏의 故鄕

丹陽李氏(단양이씨) (745).

아까돈보 2010. 12. 24. 16:31

 

 

丹陽李氏(단양이씨)

 

▣ 由來

 

 

始祖(시조)  : 李盃煥(이배환)


始祖(시조)李盃煥(이배환)은 丹山(단산)(丹陽의 옛이름) 사람으로 高麗(고려)

太祖(태조)의 三國統一(삼국통일)을도와 三韓壁上功臣(삼한벽상공신)이 되고

,門下侍中(문하시중)에 올랐다.그리고 後孫(후손)에 對(대)한 記錄(기록)이 없어져서 高麗(고려)때 出仕(출사)를 지낸 10世孫(10세손)인 李方揆(이방규)를 中始祖(중시조)로 하였다. 李盃煥(이배환)의 14世孫(14세손)인 判書(판서)李居敬(이거경)의 아들 李茂(이무)가 參贊門下府事(참찬문하부사)로서 第1次(

제1차)4王子(왕자)의 亂(란)에 李芳遠(이방원)을도와 定社功臣(정사공신)1等(1등)으로 丹山府院君(단산부원군)에 封(봉)해짐으 4로써 本貫(본관)을 丹陽(단양)으로 하고 있다.

▣ 人

 

 

朝鮮(조선)世祖(세조)때 1465年 李孟智(이맹지)는 文科(문과)에 及第(급제)해 司憲府執議(사헌부집의)를 歷任(역임)燕山君(연산군)때 靖亂(정란)으로 龍川(용천)에 流配(유배)되어 그後(후)그곳에 世居(세거)하면서 많은 後進(후진)을 養成(양성)하였다. 中宗(중종)때 中和府使(중추부사)를 지낸 李謙(이겸)은 己卯士禍(기묘사화)때 趙光祖(조광조)를 辯護(변호)하다 罷職(파직)되었으나,英祖(영조)때 吏曺參議(이조참의)에 追贈(추증)되었다.  宣祖(선조)때 李之詩(이지시)는 武科(무과)에 壯元及第(장원급제)하여 訓鍊院正(훈련원정)이 되었다가 文翰(문한)에 能(능)하므로 東班職(동반직)에 專任(전임), 注書(주서)가 되었다. 1583年에는 利城縣監(이성현감)으로 女眞族(여진족)의 侵入(침입)을

을 擊退(격퇴)하고 壬辰倭亂(임진왜란)이 일어나자 羅州牧使(나주목사) 李慶祿(이경록)의 助防將(조방장)이 되어 龍仁(용인)에서 싸우다 戰死(전사)했다.後(후)에 兵曺判書(병조판서)에 追贈(추증)되고 泰仁(태인)의 慕忠祠(모충사)에 祭享(제향)되었다.

朝鮮時代(조선시대) 義兵將(의병장) 李立(이립)은 武科(무과)에 及第(급제)해 內禁衛(내금위)에 補職(보직)되고 1592年 壬辰倭亂(임진왜란)때 素砂(소사)싸움에서 功(공)을 세워 訓練判官(훈련판관)이 되어 扈聖原從功臣(호성원종공신)이 되었다. 1627年 丁卯胡亂(정묘호란)때 安浚(안준), 金佑(김우),安宗祿(안종록)等(등)과 함께 義兵(의병)을 募集(모집), 龍骨山城(용골산성)에 들어가 張士俊(장사준)을 죽이고 오랑캐를 크게무찔러 戰功(전공)을 세워 都督(도독) 毛文龍(모문룡)의 上疏(상소)로 明(명)나라로부터 賞品(상품)을 받았다.이어 麟山鎭僉節制使(인산진첨절제사)가 되어 大鷄島(대계도)에서 布陣(포진)

하고 있다가 病死(병사)했다.兵曺參判(병조참판)에 追贈(추증)되고,旌門(정문)이 세워졌으며,1736年에 安州(안주)忠愍祠(충민사)에 祭享(제향)되었다.
 

▣ 科擧及第者(朝鮮時代)

 

  李宗烈(이종렬) (1756 丙子生) : 文科 正祖7年(1783) 親試 乙科
李謙(이겸) (1756 丙子生) : 文科 中宗2年(1507) 增廣試 丙科
李禧戇(이희당) (1855 乙卯生) : 文科 高宗16年(1879) 別試 丙科
李鏡昈(이경호) (1864 甲子生) : 文科 高宗25年(1888) 式年試 丙科
李錫泳(이석영) (1870 庚午生) : 文科 高宗25年(1888) 式年試 丙科
李日彦(이일언) (1860 庚申生) : 文科 高宗20年(1883) 式年試 丙科
李居敬(이거경) (1860 庚申生) : 文科 世宗2年(1420) 式年試 丙科
李東韻(이동운) (1805 乙丑生) : 文科 純祖25年(1825) 式年試 丙科
李湜(이식) (1781 辛丑生) : 文科 純祖14年(1814) 式年試 丙科
李德秀(이덕수) (1781 辛丑生) : 文科 宣祖6年(1573) 式年試 丙科
等 모두 66名 科擧 及第者가 있다.
(文科 19名, 武科 9名, 司馬試 38名)

▣ 世居地

 

  韓半島(한반도)의 最西北端(최서북단)으로 鴨綠江(압록강) 河口(하구)에 位置(위치)해 있는 平北(평북)龍川郡(용천군). 바로 이곳이 丹陽李氏(단양이시)가 모여사는 곳이다. 이 一帶(일대)는 鴨綠江(압록강)과 三橋川(삼교천)에 依(의)해 이루어진 複合三角洲(복합삼각주)로서 土質(토질)이 肥沃(비옥)한 平野地帶(평야지대)이다.
 

▣ 本貫沿革

 

本貫所在地 : 忠淸北道丹陽


丹陽(단양)은 忠淸北道(충청북도)丹陽郡(단양군)地域(지역)의 옛 行政區域名(행정구역명)으로 高句麗(고구려)의 赤山縣(적산현) 或(혹)은 赤城縣(적성현) 一帶(일대)였다. 丹陽(단양)은 三國時代(삼국시대)에 三國(삼국)이角逐(각축)을 벌였던 地域(지역)으로, 551年(新羅 眞興王12)에 百濟(백제)와 新羅(신라)의 共同作戰(공동작전)으로 新羅(신라)의 領土(영토)가되어 眞興王(진흥왕)이 巡視(순시)할 때 세운 赤城碑(적성비)가 남아 있다.757年(景德王16)에 奈提郡(내제군):(堤川)의 領縣(영현)이 되었다.940年(高麗 太祖23)에 丹山縣(단산현)으로 이름을 바꾸고 1018年(顯宗9)에 原州(원주)에 屬(속)하였다가 뒤에 忠州(충주)의 屬縣(속현)이 되었다.1291年(忠烈王17) 監務(감무)를 두면서 獨立(독립)하였고,1318年(忠肅王5)에 丹陽(단양)으로 改稱(개칭)하여 知郡事(지군사)로 昇格(승격)하였다.1413年(太宗13)에 郡(군)이 되었고,1895年(高宗32)地方制度(지방제도)改正(개정)으로 忠州府(충주부)의 管轄下(관할하)에 들어갔다가1914年에 郡面(군면)廢合(폐합)으로 永春郡(영춘군)을 倂合(병합)하여 丹陽郡(단양군)이 되었다. 1979年에 丹陽面(단양면)이 丹陽邑(단양읍)으로 昇格(승격

)되었다.

▣ 人口數

 

統計廳(통계청)의 人口調査(인구조사)에 依(의)하면 丹陽李氏(단양이씨)는
1985年에는 摠 3,537家口 14,343名,
2000年에는 摠 5,122家口 16,213名이 있는 것으로 調査(조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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