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산 가는길,
비내리 마을 가는길,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오랫만에 한분의 신부님을 만나기위해
이 길을 나섰다.
언제나 같은 마음이지만
청량산 가는길,
비내리 마을 가는길은
호젓하고 정겹다.
요즈음 같으면 참꽃,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어있고
눈 녹아 흐르는 강물은 유난히 푸르다.
오늘도 하늘은 쪽빛으로 푸르고
굽이진 산길은 고향가는길 같이 정답다.
언젠가 < 나의 문화유적 답사기> 로 잘알려진
유 홍준 전 문화재 청장 교수가
전국을 함께 답사다니는 관광버스 기사님께
전국을 다녀보니 제일 좋은곳이 어디?
하고 물었더니 바로 청량산 가는길,
비내리 가는 명호 , 이 길을 꼽았다는 소릴 들었다.
무슨 기준이건간에 그렇게 꼽힐만큼 이 산길, 계곡길이 좋고 좋다.
언젠가 한문학자로 유명한 지곡서당 청명, 임 창순 선생님도
중국의 장강구경이 좋다지만 나는 여기가 더 좋다고 했었다.
또한가지 나에게 의미있는건
이곳 자그마한 산골마을 비내리 마을에
정 호경 루도비꼬 신부님이 농사짓고 있기에
더 가 보고 싶은곳이 된다.
한때 소위 오 원춘 사건으로 얘기되는 세상의 소용돌이 시절,
그 중심인물이었던 가톨릭농민회 지도신부였던 그가
조용히 이곳에 정착하여 농사짓고 글쓰고 유유자적하며
칠순 노후를 보내고 있는것이다.
언젠가 건강이 좋지않아 졌다는 소문이었는데
칠순 기념으로 해안 7 천 5 백리 길과
10 여개의 큼직큼직한 섬을
도보로 걸어서 40 일을 완주했다하니
그것이 헛소문이었던듯 건강하다.
청량산 입구 허름한 식당에서
산채 비빔밥을 함께 비벼먹고
맛있다는 막걸리 두 댓병을 함께 비우며
시시콜콜, 세월을 넘나들며 추억담으로 즐거웠다.
갖고 있던 재산이란 재산은 이미다 정리했고
쓴책의 인세조차 유증 증여해 버리고
오늘은 나에게 장기 기증 증서를 보여주며
죽으면 내 몸조차 다 내어주게 되었다면서 웃으신다.
내가 디카를 들이대니까
초상권 침해라면서 손사래를 처대니
사실 이런 얘기 하는것도 폐가 될것 같다.
어찌 되었건 간에
우리는 이렇게 세월을 살았고
또 세월을 보낼것이다.
그는 청량산 뒤안 비내리 마을 어름에서
나는 안동 호반 강변 진모래 득심골에서...